다시는 나올 수 없는 소설, 왜냐면

[김성호의 독서만세 118] 나카마치 신 <천계살의>

등록 2017.09.20 08:50수정 2020.12.25 16:04
0
원고료로 응원
천계살의 책 표지
천계살의책 표지비채
<천계살의>는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소설이다. 일본 추리소설계의 기둥 중 하나로 입지를 굳힌 작가가 지난 2009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고 배경이 된 후쿠시마가 이제는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유로 다시는 만나기 어렵게 된 이 소설을 한국 번역판으로 읽을 수 있게 된 건 다행한 일이다.

<천계살의>는 나카마치 신의 1982년 작 <산책하는 사자>를 23년 만에 복간한 작품이다. 앞서 그의 대표작 <신인상 살인사건>이 <모방살의>란 제목으로 다시 태어난 것과 발맞춰 나왔다. 이후 작가의 사망을 전후해 <공백살의> <삼막살의> <추억살의> 등이 출간되며 다섯 편의 '살의 시리즈'가 인기를 끌고 나아가 한국에까지 소개가 되었으니 작가와 작품의 운이란 참으로 미루어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다.


추리·미스터리·공포 등 장르문학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문학계에서 나카마치 신은 장르를 보다 풍성하게 한 유능한 작가였다. 읽는 이의 선입견과 사고의 허점을 파고드는 트릭을 적극적으로 배치해 뒤통수를 얻어맞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방식을 선호했다.

당대 일본 추리소설의 주류는 밀실에 등장인물을 몰아넣고 주어진 재료를 바탕으로 머리싸움을 하는 방식이었기에 그의 구성이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으나 틀을 벗어난 작법이 기만적이고 기교에 치중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천계살의>는 그런 그의 특징이 잘 녹아든 작품이다. 반칙에 가까운 반전을 품고 있다는 평가도 있으나 무엇보다 흥미진진한 전개와 독자를 속여내는 트릭이 썩 괜찮아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 <모방살의>지만 <천계살의>가 <모방살의>의 응용편이란 말이 있을 만큼 더욱 탄탄한 구성과 묘사를 자랑한다. 때문에 많은 추리소설 애호가들은 <천계살의>가 나카마치 신의 최고작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소설은 추리소설 잡지 편집부에 근무하는 하나즈미 아스코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어느 날 그녀는 소설가 야규 데루히코로부터 독특한 제안과 함께 원고 하나를 받는다. 원고는 어느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결말이 나지 않은 상태다. 야규는 그녀에게 건넨 원고가 문제편이라며 자신을 포함해 두 명의 작가가 해결편, 해답편을 나누어 집필하는 일종의 두뇌싸움 기획을 제안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 속 사건은 현실이 되고 작가인 야규를 포함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한 명씩 죽음을 맞는다. 사건을 추적하는 하나즈미 아스코의 뒤를 따라 독자는 <천계살의>, 나아가 야규의 소설 속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 사건·추궁·수사·진상의 네 개 장으로 이뤄진 <천계살의>는 어디에 어떤 장치를 감추고 있을지 모르는 두뇌싸움의 장이다. 두뇌싸움은 당연히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소설을 읽다 보면 나카마치 신이 독자들의 추측을 반드시 틀리게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이런 그의 태도가 독자를 자극해 소설에 빠져들게 하고 마침내는 적지 않은 팬을 만든 것인데 책이 쓰인 지 3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장점이 완전히 퇴색되지 않아 흥미로운 독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1982년 작이지만 작가의 꾸준한 수정을 통해 시차가 무색할 만큼 세련된 작품이란 점은 따로 언급할 만하다. 최인훈이 <광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개작해 애초 문제로 지적된 시점의 모호성을 보완하고 표현을 더 매끄럽게 한 것과 비견할 만하다. 덕분에 소설을 읽는 내내 1980년대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여느 최신작 못지않은 생생함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쉽게 작품에 빠져들 수 있었다.

화자의 서술을 통해 독자를 속이는 서술트릭이 쓰인 초창기 작품으로 분류되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겐 외면할 수 없는 작품이 될 것이다. 언제 누구에게 추천하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완성도는 덤이다. 올 가을 복잡한 일상을 잊고 책 한 권의 휴식을 원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천계살의 / 비채 / 나카마치 신 지음 / 현정수 옮김 / 2015. 10. / 13,000원>

천계살의

나카마치 신 지음, 현정수 옮김,
비채, 2015


#천계살의 #비채 #나카마치 신 #현정수 #김성호의 독서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3. 3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4. 4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5. 5 대학 안 가고 12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됐다 대학 안 가고 12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됐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