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개척단 정영철(76)씨가 50년도 더 된 개척단 시절을 얘기하며 눈물짓고 있다.
남소연
"설치고 다니며 무서운 게 없던 것들이 바로 꼬랑지 내렸지. 대가리만 들면 패니께. 맨발로 그 뒷산에 오르게 시키는데, 김이 뽀얗게 나는데 계곡에 다 들어가라는 거여. 묵은 때 벗기고 정신 차리라고. 무지하게 춥더라고. 이게 내 발인지 누구 발인지." '대한청소년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깡패, 넝마주이, 고아들이 모였다혹독했던 겨울, 그는 다시 충청남도 서산으로 옮겨졌다. 62년 2월, 그의 나이 이제 스물 하나였다. "남포동 삼분지 일"을 주름잡았던 건달, 정씨의 독기도 빠졌다. 그만큼 혹독하게 맞았다. 정권을 잡은 지 1년도 안 된 서슬 퍼런 박정희 시대였다. '사회 명랑화 사업'을 내건 박정희 정권은 '대한청소년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깡패, 넝마주이, 고아들을 한데 모았다. 무임금 노동에 동원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바닷물이 잘박 거리는 황무지를 개간해야 했다. 일제시대 때 염전을 만들기 위해 제방만 세워 놓은 곳이었다. 제방마저도 무너진 곳이 태반이었다.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263만8884㎡(80만 평). 그들이 다져야 할 땅은 "저~짝부터 저~짝까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에 나는 뻘건 나문재 풀이 깔려있고 한 가운데는 갯고랑이 저 위까지 돼있고. 그냥 황무지 그 자체였지."
종로 주먹들이 윗대가리였다. 군기를 바짝 잡았다. 감시도 철저했다. 삼엄한 공기 속에 돌을 지어 날랐다. 바닷물을 막기 위한 둑을 쌓고, 수로를 파고, 길을 냈다. 말보다 한숨이 앞장선 채, 정씨는 학을 뗀 듯 고개를 저었다.
"돌이라면 아주 징글징글하지. 시원찮게 들면 괘씸죄로 뚜드려 맞아. 간신히 짊어 멜 정도로 무거운 거 50~60kg 짜리를 혼자 짊어야지. 저 도비산에서 짊어 메고 3km를 걸어온다고 생각해봐.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왔다 갔다 했어."수로를 파 놓으면 다음 날 또 왕창 무너졌다. 그럼 또 파는 수밖에. 장비라고는 삽 한 자루와 두 손이 다였다. 중대별로 '50미터'가 목표로 떨어지면 죽어도 끝내야 했다. 감독관이 와서 작업량을 확인한 후 쥐어 터지는 게 일이었다. 작업이 끝나도 맘 편히 쉴 수 없었다. 혁명공약 외우기가 과제였다.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정씨는 녹음기 버튼을 누른 듯 줄줄이 혁명공약을 읊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내가 초등학교도 못 나와서 무식한디 이것만은 안 잊어. 그렇게 외게 시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