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 비비문은 한자, 몽골문자, 만주문자 3개국 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정근
수항단 수리를 완료했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 임금이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을 편전으로 불렀다.
"삼전도에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울 테니 경들이 비문을 지으라.""소신은 지병으로 인하여 글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제일 연장자 이경전이 몸을 사리고 나섰다. 지병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명나라에 배은망덕한 글을 올리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은 예문관에서 지어 올려야 마땅한 줄로 아룁니다."조희일이 꽁무니를 뺐다.
"경은 대제학이 궐위라는 사실을 몰라 그런 말을 하는 거요?"때마침 예문관 대제학이 빈자리였다.
"소신은 글을 지을 수 없습니다."대쪽 같은 성격의 장유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최명길과 함께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대열에 섰으나 우리나라를 침공한 청나라를 칭송하는 글은 남기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딸은 봉림대군과 혼인하여 임금과 사돈 관계다.
"굽어 피소서."제일 연소자 이경석이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머금었다.
"경들은 과인의 명을 거역할 것인가? 하루 안에 지어 올려라."임금의 명이 떨어졌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신하들은 끙끙 앓았다. 글을 지어 올리자니 역사가 두렵고 거역하자니 임금의 진노가 무서웠다. 이경전은 아예 붓을 잡지 않았고 다른 신하들은 괴로운 마음으로 붓을 잡았다.
이튿날. 이경전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예 입궁하지 않았고 조희일은 거칠게 쓴 글을 가지고 들어왔다. 결국 장유와 이경석이 지은 삼전도 비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조선에서 보낸 비문을 검토한 범문정은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이경석이 쓴 글은 쓸 만하나 중간에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쓰라'고 돌려보냈다.
비문을 돌려받은 인조가 이경석을 불렀다. 이경석이 낙점됐다. 제일 연소자가 떠맡은 것이다. 일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고 욕스러운 일은 연소자 몫이었다. 산성에서 목소리를 높여 척화를 주장하던 대신들은 빠지고 윤집과 오달제라는 젊은이가 희생됐다.
인조의 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이경석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볼 뿐 붓을 잡지 못했다. 이경석은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 이후생의 6대손이다. 대대로 명나라를 섬겨온 가문의 후손이다. 그러한 자신이 명나라를 부정하고 청나라를 칭송하는 비문을 남겨야 한다니 도무지 붓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목욕재계하고 사당에 들어가 조상께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붓을 잡은 그는 울분을 삼키며 미친 듯이 써 내려갔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붓을 놓은 그는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며 통곡했다. 그리고 '수치스러운 마음 등에 업고 백길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시를 남겼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 실린 삼전도비문 전문과 인조실록에 소개된 내용이다.
명과 청 사이의 조선, 미국과 중국 사이의 한국전문天降霜露 載肅載育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惟帝之則 竝布威德오직 황제가 그것을 법 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皇帝東征軍士十萬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 이었다殷殷轟轟 如虎如豼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西番窮髮 曁夫北落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執殳前驅 厥靈赫赫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皇帝孔仁 誕降恩言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十行昭回 旣發且溫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始述不知 自貽伊戚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帝有明命 如寢之覺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我后祗服 相率而歸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匪惟恒威 惟德之依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皇帝嘉之 澤洽禮優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載色載笑 爰束戈矛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何以錫之 駿馬輕裘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가지 옷이다都人士女 乃歌乃謳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哀我蕩析 勤我穡事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皇帝班師 活我赤子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哀我蕩析 勤我穡事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金甌依舊 翠壇維新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枯骨再肉 寒荄復春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有石嵬嵬 大江之頭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萬歲三韓 皇帝之休 만년토록 우리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