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건 아마도 무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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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40대 후반. 청춘은 지나가고 그 끝자락에서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붙잡고 있다. 백세 시대임을 감안하면 아직 50세 안쪽이니 전반전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요양원에서 보낼 걸 생각하면 아무리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짖어 봐도 찬란한 청춘이란 게 아득해지곤 한다.
나이의 앞자리가 3으로 바뀔 때의 상실감과 4로 바뀔 때의 좌절감을 잊지 못한다. 이제 세상 다 산 늙은이가 된 것 같아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도 더 캐주얼하게 입고 머리도 최신 스타일을 따랐다. '어머 40대로 안 보여요'라는 말을 듣는 게 좋았고, 그러고 싶어 애썼다. 하지만 고려 시대 우탁이 쓴 <탄로가>의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라는 마지막 구절처럼, 지름길로 달려오는 나이를 어쩔 수 없다.
다행인 건, 청춘이 가고 나니 자유가 왔다. 20대에는 직장생활 하느라, 30대에는 아이 둘을 키우며 일하느라, 40대 중반까지도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딸로 사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팽팽하기만 하던 삶의 장력이 느슨해졌다. 아이들은 20살 전후가 됐고, 더 이상 직장에 다니지 않으니 내 시간이 많아졌다. 관심 있던 수업에 참여하고 공연을 보며 가족 아닌 친구들과 여행도 다닌다. 청춘과 자유를 맞바꾼 것 같다.
고진감래라더니 지금 내게 주어진 이 황금 같은 시간이 너무 좋다. 아직은 무릎이 아프지 않아 맘껏 다닐 수 있고, 조금은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동네에서 '50대 전후의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는 나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게는 절대 오지 않을 그런 나이랄까. 그런데 그런 나이가 되고 보니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눈이 좀 침침해도, 자구 뭘 까먹더라도 난 청춘이 한창일 때보다 지금이 훨씬 좋다.
나이 듦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름진 얼굴을 자연스럽게 생각해서 손대지 않고,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물 흐리지 않게 되도록 가지 않으며, 나이에 맞은 옷을 입고, 오십이 넘으면 미니스커트가 롱스커트로 바뀐다거나 등산복이 일상복이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무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