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이 바뀌던 날
김태완
선서가 끝나면 국적이 바뀐다. 개인의 인생사로는 엄청나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인생에서 중요한 다른 모든 고비들이 그러했듯 이 순간도 그저 덤덤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캐나다 시민이 되기 위해서 쉽지 않은 과정을 돌아왔으니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텐데 마냥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쪽이 휑하니 뚫린 것 같은 상실감이 엄습해 왔다. 이민을 결정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게 옳은 결정인지, 나는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 수없이 자문했었다. 그렇게 마음 속을 부유하던 의문들이 이 선서식에서 하나의 커다란 물음표가 되어 다가왔다. "힘들어도 잘 할 수 있지?"
우리도 이런 맹세를 했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비록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에 의해 암기하도록 강요된 것이었지만 메시지만큼은 강렬했다. 아직도 생생한 이 문구를 되새기며 그동안 얼마나 충성된 삶을 살아 왔는지 자문해 본다.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 가족과 일터와 이웃에게 할 도리를 다하고 살아 왔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답이 궁색하다.
그런데, 지금 또 다른 대상을 향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자신을 보니 마음이 더 무겁다.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할 만한 높은 경지는 고사하고라도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웃고, 울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묻힌 그 땅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마음이 편치 않은가 보다.
2천년 가까이 자기 땅 없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과는 사뭇 다른 영토개념을 가지고 있다. 국경으로 구분되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영역 즉, 정치,경제, 과학 등 각 분야에서 자신들이 두각을 나타내면 그것이 자기들이 지배하는 영토라는 생각이다. '한인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 우리들이 다시금 곱씹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우리가 그렇게 개방적이고 막힘 없는 사고를 가지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비로소 우리 이민자들이 가슴마다 품고 있는 부채의식을 털어내고 "힘들어도 잘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이야기를 함께 써내려 갈 수 있지 않을까?
선서를 마친 나는 이제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에서 캐나다 시민이 되었다. 국가에 대한 의무와 복종의 의미가 더 강한 피동적인 국민이기 보다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보다 능동적으로 권리를 찾아 행사하는 적극적인 시민이 되고 싶다.
하지만 어떤 국적을 가지든 우리가 한국인임은 피할 수 없는 일. 마음대로 버릴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그래서 앞으로 캐나다 시민으로서의 나의 삶은 개인의 삶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두고 온 땅의 이름이 걸린, 세대를 잇는 마라톤 경주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것으로 우리가 평가 받고, 우리 커뮤니티의 가치가 정해지고, 그 바탕 위에 후세들의 삶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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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김태완입니다. 이곳에 이민와서 산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동안 이민자로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그때그때 메모하고 기록으로 남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민자는 새로운 나라에서뿐만이 아니라 자기 모국에서도 이민자입니다. 그래서 풀어놓고 싶은 얘기가 누구보다 더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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