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민음사
시를 쓰는 신현림 님은 언제부터인가 반지하를 떠도는 살림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창 젊은 나이가 아닌, 딸아이를 돌보면서 쉰 한복판을 지나는 나이에 반지하집을 떠돌면서, 삶이란 이렇게 쓴맛 신맛 매운맛인가 하고 느낀다지요.
시집 <반지하 앨리스>(민음사 펴냄)는 꿈나라를 누비는 '앨리스'가 아닌 반지하를 떠도는 앨리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앨리스처럼 살고 싶던, 앨리스와 같은 꿈을 키우고 싶던, 궁금한 것도 많고 싱그러운 사랑도 오롯이 품던 한 사람은 매우 고단한 벼랑길이나 가시밭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시도 성서도 안 읽기에
영혼 부패 속도는 더욱 빨랐다책이 방부제인 줄 모르고, 곰쓸개, 개고기를 찾으며개소리나 하는 남자는 바다 세탁소를 영영 잊었다구하지 않으므로 바다는 출렁이지 않았다 (사랑을 잊은 남자)사내 냄새는 맡고 살아야지 하고는 일하다 잊었다해를 담은 밥 한 그릇이 얼마나 눈물겨운지쌀 한 줌은 눈송이처럼 얼마나 금세 사라지는지살아가는 일은 매일 힘내는 일이었다 (가난의 힘)어떤 이웃님은 어릴 적부터 반지하집에서 태어나 여태 반지하집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이웃님은 마당 있는 집에서 태어나 살다가 어느새 반지하집으로 옮겨서 살 수 있어요. 어떤 이웃님은 한동안 반지하집에서 살다가 마당 있는 집으로 옮겨서 살 수 있고요. 그리고 반지하집조차 못 되는 쪽방에서 사는 이웃님이 있고, 쪽방조차 깃들 수 없어 한뎃잠을 이루는 이웃님이 있습니다.
반지하집이란 지하집보다는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저는 반지하집에도 지하집에도 살아 보았는데, 반지하집은 그나마 햇살이 반 조각 즈음 들어오면서 하루가 흐르는 결을 느낄 수 있어요. 이와 달리 지하집은 아침인지 낮인지 밤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하집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새벽이나 저녁에도 눈이 부시더군요. 마치 두더지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길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은 '지하집에 살던 나'하고는 아주 딴 나라에 사는 사람들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반지하집하고 지하집을 떠돌다가 옥탑집으로 옮겨서 산 적이 있어요. 드디어 낮에 불을 안 켜고 살 수 있구나 싶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비록 여름에는 불같이 덥고 겨울에는 오지게 추운 옥탑집이지만, 환한 햇빛을 누리며 빨래를 널거나 이불을 말릴 수 있으니 참으로 느긋하구나 싶었고, 앞으로는 반드시 마당 있는 집에서 해를 듬뿍 누리자는 꿈을 키웠어요.
금수저인 어린 날 10년이 있었고
지금은 흙수저라고 당신이 말할 때나는 바람수저라 말한다 (절망의 옷을 벗겨 줘,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3)반지하 앨리스가 된 시인 아주머니는 금수저로 어린 날을 보내다가, 흙수저인 오늘날을 보낸다는데, 이녁 삶이란 문득 바람수저와 같다고 느낀다고 밝혀요. 바람수저. 바람수저. 새삼스러운 이름을 혀에 얹어 봅니다. 바람처럼 살아가는 나날을 곰곰이 되새깁니다. 바람이 되어 하늘을 날고, 바람과 같이 온누리를 푸르게 감싸는 숨결을 떠올립니다.
가진 것이 없기에 빈털털이라 할 수 있지만, 가진 것이 없으니 홀가분하다고 할 수 있어요. 홀가분한 몸이나 살림이나 마음이라면 참말로 바람 같을 터이니 바람수저가 되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숱한 길을 걸어 보면서 숱한 마음이 되어 봅니다. 숱한 삶을 치르면서 숱한 눈길을 키웁니다. 숱한 가시밭길을 새삼스레, 늦깎이에도, 힘겹게 걸어야 하면서, 이 삶이란 어떤 바람결인가를 생각합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길마다 새롭게 배우며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면서 씩씩하게 한 걸음을 내딛는 마음이 될 수 있어요.
은행도 없던 시절 시골 약사였던 엄마는환자 고쳐 버신 돈을 늘 신문지에 싸서 두셨다통일되면 외가 식구 나눠 주려고 모으셨다돈은 때로 사람을 찌르는 흉기인데나누려는 돈은 따스하고 말랑말랑했다엄마 돌아가신 후 발견한먼지 가득한, 그 슬픈 돈뭉치 (이산가족을 찾는 긴 여행, 엄마를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