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노트1977년 11월, 전달 말일 치렀던 형의 혼례식에 들어온 부조금을 기록해 놓으셨다. 그 시절 목수 일을 하셨던 아버지께서 자식들 굶는 모습을 보는 것 보다 당신께서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상관없다 하시며 청소부를 하셨는데 월급이 13,720원 이었다. 그 월급이 지금은 300만원이 넘으니 6만원의 부조금은 넉 달 월급보다 많았다.
정덕수
아버지는 이 노트에 몇 년에 거쳐 다양한 마을의 일들은 기록해 놓으셨다. 수년간(1974년 1월~1979년) 마을일을 보신 기록이고 아버지의 흔적이다.
아버지께서는 학교를 다니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일본어를 배울 것을 강요당하신 분이다. 1932년 임신(壬申)생이시니 해방이 되던 해에 우리 나이로 14살이셨을 테고 19살에 한국전쟁을 맞으셨을 거다. 더구나 38선을 바로 개울 하나를 사이로 한 갈천에서 말이다. 그런 시절을 살아오신 분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일본어를 배운 이들만의 글씨체를 아버지께서도 사용하셨다.
아버지는 어르신들과 함께 옛날을 회상하실 때 항상 일제치하를 '왜정 때'라 하셨고, 한국전쟁기간은 '인공 때'라 하셨다. 큰어머니와 대화를 하시며 "형수 왜 거 왜정 때죠. 병자포락(병자년 수해)때 말입니다"로 말씀을 하시면 큰어머니께서는, "하이고 작은아버지 내가 그때 동상(동생) 손 붙들고 뛰다가 그만 손을 놓쳐 동상을 잃었는데 작은아버지가 기기나(기어 다니기나) 했었나?"하시곤 했다.
큰어머니께서 밑의 동생을 잃으셨다는 병자년 수해에 대해 잠시 설명하면, 양양군에서만 550명이 넘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나왔다고 한다. 당시 물이 얼마나 많이 나갔는지는 오색초등학교의 운동장 높이에서 1미터 가량 파면 모래가 나올 정도였다. 학교 운동장은 물론이고 주변 어디나 비슷한 깊이를 파면 고운 모래가 한 없이 나온다.
병자년이 1936년이니 아버지의 말씀에서 왜정 때는 분명히 맞다. 1936년 7월에 발생했던 수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정리해야겠다.
노트엔 몇 년간의 반장 모곡과 이장의 모곡을 마을에서 걷은 기록이나 마을일에 동원 된 인부들에 대한 기록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반장을 맡으면 자식들이 바쁘다"는 말 그대로 반회나 마을의 회의는 물론이고, 이장과 반장 모곡을 받으러 마을을 도는 일까지 동생과 내가 심부름을 했다. 자연히 마을 어른들의 성함과 가구수를 지금도 거의 모두 기억하는데 이장과 반장 모곡을 낸 명단에 애초 이름이 누락된 이들이 여럿 있었다.
아마도 300원 하는 반장 모곡을 내지 못하는 이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들을 일부러 누락시킨 걸로 보인다. 아버지는 마을 터잡이 목수셨지만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홀아비로 자식들을 키우다보니 형편이 참으로 궁색했다. 자식들 끼니 걱정을 늘 해야 될 정도로 곤궁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팍팍한 살림살이로 고생하는 이웃을 배려한 아버지의 성품을 새삼 느끼게 됐다.
요즘이야 반장은 모곡도 없고 전출입과 같은 일에서 도장을 찍어 주는 일도 없지만 당시에는 반장이 마을의 잡다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이장은 지금과는 달리 제법 지역의 유지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마을 전체에서 반장 모곡의 곱절에 해당하는 모곡을 각 반의 반장들이 집집마다 걷어 주었으니 이장은 제법 할 만한 자리였다.
아버님이 작성하신 기록 중에는 당시 마을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어떤 이가 불법으로 마을 주민들을 푼돈으로 동원해 주목나무를 벌목한 사건이 있었다. 한겨울 돈이 귀한 산촌에서 몇 백 원 벌이는 눈에 불을 켜고 서로 하겠다고 나섰다. 처음엔 점심을 준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서로 하겠다고 나서니 슬그머니 점심은 각자 도시락을 싸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평소 마음 맞는 분들과 어울려 현장에서 아낙네들이 점심밥을 하고 찌개를 끓여 드셨다고 기록해 놓으셨다.
양기성 돼지고지 3근양근석 고등어 5손곰보 막걸리 1말여기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무엇을 내놓으셨는지는 기록해 놓지 않으셨다. 이틀 정도 일을 마치고 우리 집에 모이셔서 각자 분담을 했던 기억이 또렷하게 난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국수 5관을 내기로 하셨는데 이건 새참을 드시기 위해 필요했다. 아주머니들은 돌아가며 당번을 정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낸 뒤 산에 들어가셔서 새참부터 점심밥과 오후 참까지 챙겨주고 내려오기로 했었다.
3주 정도 이 일들을 하셨는데 2번 돈을 받아 오시고 난 뒤에 이 일이 불법이란 게 드러났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 한동안 그는 구속됐었다. 재판을 받았지만 얼마나 많은 양의 주목나무가 도벌되어 반출되었는지는 경찰이나 검찰이 밝히지 못하고 풀어주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들려주신 말씀으로는 그의 벌목에 당시의 경찰과 검찰도 연관이 있었던 걸로 기억나신다고 하셨다. 불법은 어느 때나 사회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암적인 존재인가 보다. 그런 숨겨진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와 같은 반장 일을 보던 두 분도 이런 기록을 했을 텐데 아무도 조사를 받지 않았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고단하게 사셨던 아버지의 지난날 삶의 흔적들이다. 난 1977년 11월의 기록에 눈길이 멎었다.
바로 그 직전인 10월 말일에 형이 혼례식을 올렸다. 형은 작년 10월 21일 환갑을 지낸 뒤 세상을 떠나셨다. 그 형의 혼례식 당시 들어 온 축의금과, 부조로 들어 온 물품들에 대한 기록이다. 일가친척을 비롯해 온 마을주민이 오셨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면장을 비롯해 우체국장 등 많은 이들이 3일에 거쳐 잔치를 치렀는데 당시의 내 기억에는 10만원을 빌려서 혼례를 준비했다.
축의금을 받은 기록을 보니 60,000여 원이 들어왔는데 사실 당시 주민들의 생활 형편으로 보아서는 많은 돈이다. 1977년에 일반미 한 말 값이 2,500원에서 막 올라 3,200원을 할 때다. 축의금은 대부분 200~300원을 내고 마음을 넉넉히 쓴다면 500원이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1,000원 이상씩 낸 이들이 대부분이고 그 이상을 낸 이들도 보이는 걸 보니 아버지께 대한 마을 분들의 마음을 알 거 같다.
그 뒤엔 쌀과 술, 국수 등 잔치에 소용되던 물목을 낸 이들과 물량이 적혀있다. 이분들은 축의금을 내고도 어려운 살림에 장성한 큰 아들을 장가보내는 아버지의 입장을 배려한 것이다.
전옥용 국수 3관윤춘녀 국수 3관이상수 편 1기(떡을 이야기 하고 쌀 한 말로 만든 떡의 양이다)김지선 편 1기양기성 편 1기박주옥 국수 3관(소면으로 현재 판매되는 큰 봉투의 국수 두 덩이를 한 관이라고 한다.)김재협 국수 1관이원근 국수 1관양근석 백미 1두(1두는 10되 1말을 이른다. 8kg의 양으로 1가마니는 80kg이다.)양주석 탁주 3두이남옥 국수 3관(이남옥은 내 친구의 이름으로 당시 아버지께서는 친구의 어머니 성함을 모르셨다.)홍철표 백미 1두김영기 백미 1두양경수 백미 1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