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모인 자리, 감사기도!
한미숙
"나, 이런 거 말고 믹스커피 줘봐~""어머, 우리 집에 믹스커피는 없는데."막내동서가 꽤 괜찮은 커피를 대접하겠다고 정성껏 내린 커피를 내오자 누군가 믹스커피를 찾았다.
오랜만에 5남매의 부부들이 모이니 할 얘기가 쏟아져 나온다. 그러다 최근 청주에 사시는 시댁의 작은 외숙모님이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얘기를 했다. 우린 오늘 아니면 갈 시간이 안 된다 하여 모두 청주로 향했다. 작은 외숙모님은 어머니의 작은올케이다.
20대 후반, 결혼하기 전 대전에 인사하러 왔을 때 장차 시어머니가 될 분 옆에서 작은 외숙모님은 당신의 타고난 유머와 재치로 어색한 자리를 재밌는 분위기로 만드셨다. 어머니와 작은 외숙모, 두 분은 시누와 올케로 관계가 무척이나 애틋했다.
어머니는 생전 작은 외숙모를 만나러 청주에 가실 때마다 여행의 기쁨을 만끽하셨다. 그 기쁨 뒤에는 어머니의 막냇동생(작은 외삼촌)의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아이고,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혀. 119는 생각도 안 나. 그래도 옆집에 우덜보다 좀 젊은 사람들이 사니께 그 짝으로 막 달려갔지. 여기 신고 좀 해달라구 말여. 어휴 마누라 갔으면 나는 안 돼, 못살어~" 작은 외삼촌이 기력 없고 눈빛이 흐려진 작은 외숙모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사건 당일'을 얘기하셨다. 그 순간은 아직도 아찔하다며 목소리가 떨렸다. 작은 외숙모님 입가에 연한 미소가 머무는가 싶더니 못내 안쓰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을 감추기라도 하듯 작은 외숙모가 방안에 둘러 앉아있는 우리에게 말했다.
"니들 커피 한 잔씩 햐~, 저 짝에 가서 머릿수대로 타와 봐."그러자 내 옆의 아랫동서와 막내동서가 냉큼 일어나 주방으로 나갔다.
"아, 나는 커피가 좀... 오기 전에도 먹고 왔는데...""마셔, 오늘 이 커피는 다 마셔야 돼. 작은 외숙모님 선물이야!"막내 시동생이 커피에 이견이 있는 듯, 중얼거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막내의 바로 형인 아래 시동생이 강력하게 못을 박았다.
"어여 마셔. 하루 한 잔은 치매에도 좋댜~. 난 하루에 꼭 두 잔은 마신다. 이게 비타민이여. 피부도 고와진다구, 허허허"내년이면 구순에 접어드는 동갑내기 부부, 풀기가 다 빠진 노부부는 서로에게 믹스커피를 권했다. 먼저 갈 뻔했던 작은외숙모가 커피 한 모금을 천천히 마셨다. 작은 외삼촌은 작은 외숙모가 당신 옆에 있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다행이다 싶어 가슴을 쓸어냈단다.
"먼저 가기만 해봐, 내가 가만 안 있을거여~""그럼 어떡혀?""가서 끄집어 와야지 머~"80대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외삼촌과 작은 외숙모, 그리고 70대부터 60대 50대가 모두 섞인 한 방의 열두 명은 웃으면서 설탕 한 톨 빼지 않은 온전히 100프로의 달달한 믹스커피를 홀짝였다.
'치매예방과 비타민, 피부가 고와지는' 믹스커피는 그동안 마셔왔던 그 어떤 믹스커피보다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내 인생의 커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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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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