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미국에 막힌 케인즈 구상, 비트코인이 되다

[블록체인 세상을 삼키다 ①] 단점 많은 달러 기축 대신 케인즈가 구상한 국제 통화 체제로

등록 2018.01.19 09:52수정 2018.01.19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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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 참석한 해리 덱스터 화이트(사진 왼쪽)와 존 메이너드 케인즈(오른쪽).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 참석한 해리 덱스터 화이트(사진 왼쪽)와 존 메이너드 케인즈(오른쪽). IMF(카피레프트)

'가상통화 체제를 구상한 것은 케인즈였다?'

2차 세계 대전이 마무리되던 지난 1944년, 45개 연합국 700여명의 고위 경제 관료들이 미국 뉴햄프셔 주 브레튼 우즈에 모였다. 이 브레턴 우즈 회의에서는 금 본위제와 고정환율제, 달러 기축통화 등 주요한 국제 질서 논의가 이뤄졌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이 자리에서 이색적인 주장을 한다. 국제 통화인 방코르(Bancor)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 세계 각국이 무역을 할 때, 각 나라의 통화를 사용하지 않고, 이 국제통화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케인즈, 브레튼 우즈 회의서 국제 통화인 '방코르' 도입 제안

그가 국제 통화를 주장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국제 통화 활용을 통해 무역의 국제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고, 동시에 특정 국가의 위기가 다른 국가로 전이되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러가 기축통화일 경우, 미국 내에서 유동성 위기가 일어나면, 경제 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전이된다. 하지만 국제통화를 활용할 경우, 경제 위기의 전이는 제한적인 수준에 그친다는 게 케인즈의 구상이었다.

지금의 비트코인처럼 국경 없는 화폐를 만들자는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달러가 아닌 국제통화를 도입할 경우, 초강대국의 지위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미국 정부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국경 없는 화폐가 만들어졌다면, 지금의 가상통화 열풍은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가상통화 열풍의 근원은 국경 없는 가상화폐가 전 세계 통화를 대체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다. 그런데 이미 국경 없는 화폐가 존재한다면 이런 메리트는 사라진다. 가상통화의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은 알지 못했지만 국제 통화체제를 생각한 것은 케인즈의 혜안이다.


비트코인 ATM 2014년 미국에 설치된 비트코인 ATM
비트코인 ATM2014년 미국에 설치된 비트코인 ATM위키피디아(카피레프트)

통화 권력 잡으려 했던 미국 정부 반대로 무산된 케인즈 구상

브레튼 우즈 합의안 가운데 금본위제와 고정환율제는 미국 정부가 스스로 포기하면서 사라졌지만, 달러 기축 통화는 아직도 세계 질서의 한 부분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달러 기축통화제는 지금까지 많은 문제점을 노출해왔다.

달러 기축통화 체제의 단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게 지난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미국 저소득 주택 담보 대출자들이 금리 상승으로 주택 원리금을 제때 갚지 못했다. 금융 기관들은 대출금 회수 불능 상태에 빠져 파산한다. 달러 유동성 위기는 다른 나라 금융기관으로 퍼진다. 유동성 위기는 실물 경제로 전이되면서 국제 경기 침체로 이어진다.

미국의 유동성 위기는 세계 유동성 위기로 번진다. 달러 기축 통화 체제가 가진 가장 큰 단점이다. 이에 따라 달러 기축 통화 체제를 대체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상 통화'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고, 특정 정부의 통제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세계 어디에서나 거래될 수 있는,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가상통화다. 케인즈가 구상한 국제 통화가 기술 발전으로 현실화되는 셈이다.

"달러 기축 체제의 단점이 새로운 통화 질서 모색으로"

 비트코인 창시자인 나카모토 사토시의 논문. 논문 서두에서 금융기관 없이 화폐 거래를 할 목적으로 비트코인을 개발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비트코인 창시자인 나카모토 사토시의 논문. 논문 서두에서 금융기관 없이 화폐 거래를 할 목적으로 비트코인을 개발했다고 명시하고 있다신상호

오정근 건국대 교수는 "달러 기축 통화 체제는 지금까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 여러 차례 그 단점을 노출해왔다"면서 "특정 국가의 경제 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통화 체제로서 가상통화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상통화의 대장주인 비트코인을 창시한 '나카모토 사토시'도 대안적 경제 질서를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 2008년 발표한 비트코인 논문 첫 머리에서 '금융기관'을 제거한 화폐 거래를 구상했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A purely peer-to-peer version of electronic cash would allow online
payments to be sent directly from one party to another without going through a
financial institution. (완벽한 P2P 버전의 전자 화폐는 온라인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직접 전달될 수 있다. 금융 기관의 도움 없이 말이다.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논문 발췌)

최근 가상통화 투기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나오지만, 가상통화의 역할은 향후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 2015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2027년 세계 GDP의 10%가 블록체인 기술 상에 저장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블록체인 기술에 저장된다는 것은 블록체인 기술을 토대로 한 가상통화로 봐도 무방하다. 즉 상품을 거래할 때, 10명 중 1명은 가상통화로 거래할 것이란 전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스위스와 일본 등도 이런 흐름에 발맞춰 움직이고 있다. 일본은 지난 2016년 4월 자금 결제법을 만들어, 가상통화를 지급 결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는 재산상의 가치로 인정했다. 스위스도 가상통화 취급업을 허용하면서, 대신 자금세탁방지법의 적용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일본과 스위스 등 가상통화 흐름에 맞춰 제도 마련, 한국 정부도 따라야

가상통화 거래를 전면 금지해왔던 러시아는 지난해 10월 입장을 바꿨다. 푸틴 대통령이 가상통화 규제 체제를 만들어,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한 것. 중국 정부도 별도의 가상통화 개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흐름에 맞춰 한국 정부도 가상통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진화 한국블록체인협회 준비위원회 공동대표는 "사실상 시효가 다한 전자금융거래법 대신 블록체인 등 기술 발전에 대응하는 자금 결제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실질적으로 투자자를 보호하고 시장을 건전화 시키는 로드맵도 구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상통화, 향후 세계 경제 역할 일부 맡을 듯

현재까지 흐름을 볼 때, 가상통화는 세계 경제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케인즈가 구상한 국제 통화 역할을 어떤 가상통화가 떠맡을지는 불분명하다. 비트코인이 될 수도 있고, 미국이나 중국 정부가 개발한 또 다른 종류의 가상 통화가 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미국 등 선진국 정부의 지지를 받는 1~2개의 가상통화만이 미래를 보장받을 것이란 점이다. 세계 각국 정부의 통제권 밖에 놓인 가상통화는 자력 생존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가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국제 통화 도입에 반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특히 기축 통화국으로 많은 이득을 본 미국이 지금의 '통화 권력'을 쉽사리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홍철 DB금융투자 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수십 개의 가상화폐 중 1~2개만 살아남아 민간 가상화폐의 '표준'처럼 자리잡고 각국 은행과 정부도 자신만의 가상화폐, '소버린 크립토커런시'를 만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상통화 #케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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