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야채상 허씨는 어떻게 살인자가 됐나

시위중 전경 살인죄로 11년 옥살이... 대전지검에 진정 제기

등록 2018.01.24 10:12수정 2018.01.2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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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살인죄로 누명을 쓰고 11년 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시위에 참석했다 살인죄로 11년 동안 옥살이를 한 허정길씨(60)가 최근 자신의 사건이 수사기관의 고문과 구타에 의해 조작됐다며 진정을 제기해 주목된다.

허씨는 23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사건 직후 경찰과 검찰에서 각각 구타와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돼 살인죄로 1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허씨는 "당시 낮에는 대전 기무사 건물 지하실로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고 저녁에는 당시 충남도경찰청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후에는 지금의 대전경찰서(현 대전 중부 경찰서)에서 형사계 직원의 지시로 전투경찰 및 의무경찰에게 구타와 고문을 받았다"며 "갈비뼈가 부러져 쓰러졌는데도 구타가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검사에게 '강요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항변했는데도 구타와 함께 임의로 작성된 조서에 강제로 지문을 날인하게 했다"고 밝혔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항변했는데도 강제로 지문 날인"


 허씨 사건을 '전경역살 버스탈취범 검거' 제목으로 보도한 경향신문(1987년 6월 22일 기사 갈무리). 당시 이 신문 보도 내용에 따르면, 허씨가 저지른 '전과 15범'의 실제 내용은 모두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그가 생계를 위해 트럭을 몰며 가벼운 접촉 사고 등을 일으킨 것에 따른 벌금형이었다.
허씨 사건을 '전경역살 버스탈취범 검거' 제목으로 보도한 경향신문(1987년 6월 22일 기사 갈무리). 당시 이 신문 보도 내용에 따르면, 허씨가 저지른 '전과 15범'의 실제 내용은 모두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그가 생계를 위해 트럭을 몰며 가벼운 접촉 사고 등을 일으킨 것에 따른 벌금형이었다.심규상

그는 당시 대전에서 리어카 야채상을 하다 항쟁에 참가했다. 어린 학생들이 최루탄을 맞으며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 힘을 보태고 싶어 시위에 참가했다.

항쟁이 무르익던 6월 19일 밤. 그는 당시 동양백화점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다 원동 4거리 방향으로 이동하기 위해 마침 다가오던 시내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버스는 원동 4거리까지 운행한다는 약속과는 달리 동구 삼성동 부근에서 멈춰 섰다. 대전역 부근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어 더 이상 운행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버스운전기사는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나는 더 이상 운전하지 못하겠다'며 '운전할 수 있으면 원동4거리까지 대신 하라'고 운전대를 허씨에게 맡겼다. 허씨는 화물 운반 일을 하기 위해 대형면허를 소지하고 있었다.

허씨는 1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시위대와 진압 경찰 사이를 조심스레 다가갔다. 대전역을 지나면서 유리창을 뚫고 최루탄이 날아 들었지만 원동 4거리 부근 대전우체국까지 약 700미터 정도를 무사히 운전했다. 이후 버스에서 내려 다른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시위 도중 살펴보니 좀 전에 자신이 운전해 대전우체국 앞에 세워 놓았던 시내버스는 대전역 광장 앞 시계탑 앞에 세워져 있었다. 누군가 시내버스를 대전역 앞까지 다시 되짚어 운행한 것으로 보였다.

버스는 최루탄 직격탄을 맞은 듯 허씨가 운전할 때보다 더 심한 손상을 입었다. 버스 유리 곳곳에 구멍이 뚫려 깨져 있었지만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버스가 그 지경이 된 건, 버스가 전경대열을 덮치면서 전경 1명이 사망하고 2명의 전경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시위 다음날, 영문도 모른 채 기무사 건물로 끌려가

허씨는 다음 날인 20일 아침에서야 대전역 앞 시위 도중 버스가 전경대열을 덮쳐 전경 1명이 숨졌다는 뉴스를 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해자로 지목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평상시처럼 일터인 중부시장에서 야채를 팔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됐을까? 젊은 청년 5~6명이 다가와 허씨를 무작정 끌고 갔다. 끌려간 곳은 앞서 언급한 대전 기무사 건물 지하실이었다. 그는 "버스를 몰았지만 내가 운전하면서 사람을 죽인 적은 없다"고 항변했다.

경찰은 허씨에게 화염병으로 버스기사를 위협해 버스를 탈취한 후 시위대와 대치 중이던 진압경찰에게 의도적으로 버스를 돌진해 사망하게 한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시인할 것을 요구했다.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부인할 때마다 구타와 고문이 뒤따랐다. 수사를 하면서도 경찰은 그를 무릎 꿇리고, 등에는 '전경 죽인 놈'이라는 표찰을 붙였다.

그렇게 사건은 조작됐고, 이 일로 허씨는 살인 및 살인미수, 집시법 위반죄 적용을 받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법정에서 전경 몇 명이 "상급자가 무조건 허씨를 가해자로 지목하라고 했다"고 증언했지만, 판사는 이마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술을 먹고 스스로 영웅심리에 도취된 나머지 데모 진압 경찰에게 겁을 주고 그로 인해 심리적 쾌감을 누리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픈 어리석은 심정에서 결국 살인의 결과까지 용인했다"고 돼 있다. 술을 먹고 영웅심리에 의도적인 살인을 했다는 것이다. 항소와 상고도 기각됐다.

그는 "교도소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집필 허가'를 요구할 때마다 다른 교도소로 이송시키는 방법으로 번번이 집필 허가를 막았다"고 주장했다. 실제 그가 복역하던 11년 동안 전전한 교도소는 14곳에 이른다. 1년에 1.2회 꼴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출소를 할 때까지 자신의 사건 기록조차 열람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허씨는 기자에게 "내가 버스를 몰 때에는 버스 승객이 10여 명 타고 있어 목격자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내가 화염병으로 버스 기사를 위협해 버스를 탈취했다면 '특수 강도죄'와 '인질 죄' 등을 추가 적용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모친과 소박한 꿈을 꾸던 29살 청년은 40대가 되어서야 가석방(1997년)으로 햇살 앞에 섰다. 그가 세상 밖에 서기 전 5개월을 앞두고 어머니는 세상을 떴다.

그는 여전히 '살인죄'라는 딱지를 붙인 채 60대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최근 법무부에 사건의 진실을 밝혀 달라며 진정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대검찰청을 거쳐 대전지검에 배당됐다.
#1987 #허정길 #살인죄 #고문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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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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