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화 앞둔 트럼프가 보면 좋을 책

[리뷰] '잊힌 전쟁' 한국전쟁 소환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

등록 2018.03.12 10:43수정 2018.03.1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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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잊힌 전쟁'이다. 적어도 미국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한국전쟁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감안한다면, 그리고 수만의 미국인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고 전쟁 이후 지금까지 3만여 명의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원제 : The Korean War: A History)을 통해 한국전쟁의 기억을 소환한다.


먼저 브루스 커밍스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에게도 친숙한 학자다. 그가 1981년 쓴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회자되는, 그야말로 역작이다. 그는 이 저작을 통해 '한국전쟁은 내전'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한국전쟁은 발발 직후부터 한참 동안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의 남침'이라는 가설이 움직일 수 없는 진리처럼 군림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브루스 커밍스의 시각은 천동설을 반박할 가설을 내놓은 코페르니쿠스만큼이나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커밍스는 이 책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에서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점에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 와중에 미국은 어떤 구실을 했는지에 주목한다.

커밍스가 소환한 과거는 실로 경악스럽다. 미국이 북한 지역에 감행한 폭격 그리고 미군과 남한 군대가 자행한 양민학살이 특히 그렇다.

먼저 커밍스는 북한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에게 당한 폭격의 기억 때문에 '유격대 국가'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폭격은 산업시설 파괴를 넘어 사회 자체를 붕괴시키는 지경이었다는 게 커밍스의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인이 잘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미국이 3년 동안 민간인 희생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북한에 융단폭격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중략)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이 그 전쟁(한국전쟁 - 글쓴이)에 관해 처음 듣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공습은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소이탄 투하부터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 전쟁 막바지에 북한의 큰 댐들을 파괴한 것까지 다양했다. 북한이 전쟁 발발 며칠 만에 미국에 제공권을 잃은 제3세계의 작은 나라였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북한 공습은 일본과 독일에 맞선 공중전을 더 정교히 다듬어 응용한 것이었다." - 본문 213~214쪽

"제2차 세계대전에서 쓰인 공군의 주문, 즉 소이탄이 적의 사기를 꺾고 전쟁을 더 빨리 끝낼 것이라는 주문은 한국전쟁에서도 반복되었지만, 그 숨은 의도는 한국 사회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 본문 218쪽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1976년 판문점 도끼살해사건 등 일련의 도발행위를 감행하며 미국을 자극했다. 냉전 종식 이후엔 한 치의 양보 없는 자존심 대결을 펼치며 미국과 맞섰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 동안 아예 사회 파괴를 시도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결국 북한의 뿌리 깊은 적대감은 한국전쟁을 통해 체득한 경험의 소산인 셈이다.


경악스런 양민학살의 기억 

커밍스는 이어 양민학살의 역사를 다루는데, 이 대목은 무뚝뚝하게 읽어내려가기 힘들다. 그 규모와 양상이 글로만 읽어도 참혹하기 이를 데 없어서다. 커밍스는 양민학살 사례로 1950년 대전 형무소 학살 사건을 드든다. 그는 이 사건을 발칸 내전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 최악의 민간인 학살'로 꼽히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에 빗댄다.

"58년 전 북한 인민군이 서울 남쪽의 도시 대전에 밀어닥쳤던 또 다른 잔혹한 7월에 남한 경찰 당국은 현지 감옥의 정치범, 남성과 소년, 그리고 몇몇 여성까지 끌어내 학살하고 구덩이에 내던진 뒤 흙으로 덮었다. 사망자는 4000~7000명으로 추정되며, 그들의 이야기는 반세기 동안 묻혀 있었다." - 본문 241쪽


커밍스는 학살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미국이 남한 군경이 저지른 학살행위를 수수방관했다고 날을 세운다. 커밍스의 말이다.

"미군 장교들은 이 학살이 자행되는 동안 여유롭게 지켜보며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겼을 뿐, 이를 저지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몇 달 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그 사진들을 기밀로 분류했고 1999년에 와서야 기밀에서 해제했다. 당시 미국의 공식 역사는 그 학살의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렸다." - 본문 241쪽


커밍스는 동시에 미국이 저지른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도 함께 고발한다.

잊힐 수 없는 당시의 기억 

 미 워싱턴 D.C.에 서 있는 한국전쟁 기념비. 브루스 커밍스는 미국이 한국전쟁의 기억을 묻으면서 대외정책에도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됐다고 꼬집었다.
미 워싱턴 D.C.에 서 있는 한국전쟁 기념비. 브루스 커밍스는 미국이 한국전쟁의 기억을 묻으면서 대외정책에도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됐다고 꼬집었다. 지유석

앞서 언급했듯 미국은 한국전쟁을 '잊힌 전쟁'이라고 부른다. 사실 미국으로선 한국전쟁이 불편하기 그지 없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며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미국이 동아시아의 조그만 농촌국가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궁극의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운 잘못된 전쟁"이라는 당시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유명한 말은 미국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커밍스는 이런 잊힌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러면서 미국이 한국전쟁에 가진 왜곡된 시각이 한반도는 물론 대외정책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꼬집는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히 그렇다.

미국은 북한을 '불량 국가', '테러 지원국' 쯤으로 치부해 왔다. 심지어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묶었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향해 '화염과 분노', '로켓맨' 등의 거친 언사를 쏟아내며 한반도 긴장을 한껏 끌어 올렸다.

그런데 이 같은 시선은 사실 북한에 대한 편견과 무지의 소산이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커밍스는 "미국인이 지닌 북한의 주된 이미지는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의 편협한 몽고반점을 띠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왜곡된 시각은 중동정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커밍스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겪은 실패의 경험을 이라크에서 되풀이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미군은 1945년 9월 남한에 도착했으며,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몰락한 지 오래된 지금도 3만 명의 미군이 그곳에 주둔해 있다. 더 오싹한 것은 전쟁이 재발할 수 있으며, 그것도 곧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1994년 6월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에 불안을 느끼면서 새로운 한국전쟁이 거의 일어날 뻔했다. (중략)

21세기에 들어서서 미국인들은 한국에서 했던 경험을 이라크에서 다시 되풀이했다. 미국은 미리 생각해보지도 않고, 적절한 고려나 자기인식도 없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치, 사회, 문화적 덤불 속으로 돌진했으며 이제야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깨닫는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교차하는 지역에서는 위대한 문명이 발흥하여 번성했지만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 본문 311~312쪽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는 물론 미국에게도 영향을 미친 중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전쟁을 잊으려 했고, 잊히게 하는데 일정 수준 성공했다. 그러나 커밍스가 소환한 한국전쟁의 기억은 이 전쟁을 잊어서도 또 왜곡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일깨운다.

일단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세계 도처에 군사기지를 운영하며 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외정책에서 차지하는 군부의 영향력도 강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오로지 군사전략만 우선시한 나머지 상대국의 사정에 자주 무지를 노출했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은 종종 제3세계 국가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 상징적인 사례가 바로 한반도였다.

미국의 무지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이어졌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쫓겨나다시피 발을 뺐고, 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선 모래수렁에 빠져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모양새다. 여기에 북핵 문제는 수 년째 표류 중이며 시리아 내전 문제엔 길 잃은 기색이 역력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커밍스의 한국전쟁 기억소환 작업은 실로 의미 있는 성과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브루스 커밍스의 학문적 성취는 폄하되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사실' 보다는 '이념'의 잣대가 더 강한 힘을 발휘했던 분위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지난 1994년 당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옛 소련 시절 생산된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건네면서 한국전쟁의 새 지평이 열렸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이 문서를 토대로 한국전쟁이 옛 소련과 중국, 북한 3자가 치밀한 기획하에 한국전쟁을 감행했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새로운 연구결과를 감안해 볼 때, 브루스 커밍스의 가설은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기원> 머리말에서 밝힌 기본전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전쟁의 원인은 주로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의 사건에서 찾아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식민통치기간 동안 한국에 부과된 외부세력과 그것이 전후의 한국에 남긴 독특한 자취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마침 9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초청을 수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무엇보다 북미 접촉을 통해 서로간의 해묵은 적대감을 해소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특히 미국은 과거 한국전쟁 당시 역사를 복기해 보기 바란다. 지금 북한이 가진 적대감은 당시의 기억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커밍스가 적극 조언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다. 트럼프 행정부가 그의 조언에 귀 기울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부디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당국자들이 북한과 접촉을 준비하면서 지난 과거를 반드시 되짚어 보기 바란다. 실현 가능성 여부와 별개로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첫 단추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현실문화, 2017


#브루스 커밍스 #악의 축 #한국전쟁 #대전 형무소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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