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가 법무부 내의 만연한 남성중심문화와 그 때문에 지금껏 쉬쉬해왔던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범죄를 다스려야 할 법무부에서 조차 성범죄가 일어났다 라는 사실 자체가 미투 운동에 불을 붙이기가 충분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연극계, 문화계에서 충격적인 고발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노벨 문학상에 거론되던 시인이 실제론 후배 여성 문인들에게 성추행을 일삼는 괴물'이라는 폭로가 나올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미투 운동의 시작은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폭력 사건이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이 트위터 #MeToo 해시태그를 통해 그동안 자신이 당했던 일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여성인권이 상대적으로 잘 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미국에선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성도 자신이 한 일에 정당한 보수를 받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승진을 할 수 있고, 동료들로부터 오늘 왜 화장을 안 했느냐거나, 옷차림이 섹시하다는 등의 희롱에서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남존여비에 얽매인 한국 사회를 경험했던 나는 막연히 미국은 다르겠지 라고 생각했다. 미투 운동을 통해 배신감을 느꼈다. 성폭행, 성차별은 범국제적인 문제고, 결국 어느 나라에서 살든 젠더 문제에 맞서 싸워야만 하는 것을 느꼈다.
미투 운동으로 인한 배신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배우 까뜨린느 드뇌브는 내가 존경하는 배우였다. <인도차이나>란 영화에서 50대의 그녀가 자아내는 우아함과 열연을 보며, 나는 꼭 저 배우처럼 아름답게 늙어갈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남성에게는 여성을 유혹할 자유가 있으며 미투 캠페인은 지나친 청교도주의'라며 미투 운동을 비판했다. 그녀는 후에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고 사과하긴 했지만, 그가 거론한 '자유'는 약자와 동일시하는 나에게 비수를 꽂고 난 후였다.
그 '자유'가 대체 무엇이길래 한 사람의 인권을 짓밟고 신체를 유린하고 평생의 트라우마를 남기는 일을 용인할 수 있을까? 강자가 권력을 휘두르는 자유를 보장한다면, 약자가 강자의 권력에서 자유로울 권리는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혹자는 그러한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법이란게 제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법이 항상 단단한 장치가 될 수 있을까.
작년 말,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이 있었다. 조두순의 12년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가벼운 형량을 다시 심판해달라는 청원이었다. 나는 중학생 때 <소원>이라는 조두순 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았다. 사건 직후 병원에서 아빠가 나영이의 옷을 갈아입혀주려고 하자, 반사적으로 펑펑 울음을 터뜨리며 저항하는 장면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이런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가 12년 형량을 받은 이유는 그 당시 유기징역의 상한이 15년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유기징역의 상한이 30년으로 개정된 것을 고려하면 법이 얼마나 때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는지, 얼마나 허술한지를 알 수 있다.
권력은 결국 법, 제도가 아닌 시각에 있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은 오랫동안 사회 통념으로 자리잡아왔다. 남존여비가 깊게 뿌리내린 사회에서 자연히 여성은 하등한 인격체로 여겨졌고, 여성의 권리는 제거됐다. 성범죄의 경우 특히 여성을 하찮게 여기는 시각이 권력으로 발동한 예다. 그런데 학교에서 매번 성폭력 예방교육이라고 주입시키는 내용은 남존여비 뿌리에 양분을 주는 것과 다름없다. 남성의 성과 여성의 성의 동등함을 알려주지도 않을 뿐더러, 대부분의 내용은 여성을 향해 지나친 노출을 피하라, 골목길을 피해 다녀라 같은 내용이다. 마치 피해자가 조심만 하면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젠더 권력과 더불어 피해자를 억압하는 데 크게 작용한 것이 한가지 더 있다. 한국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수직적 관계를 행사해도 괜찮다는 통념이 있다. 미국 학교에 다니며 문화 충격을 받은 것은 학생이 선생님에게 '당신은 무례하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 미술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었다. 연극에 활용될 소품을 제작하기 위해 재봉틀 사용을 허락받으려 했는데, 담당 교사는 나에게 '바빠죽겠는데 짜증나게 굴지마'라며 요구를 무시했다. 순간 수만가지 단어가 목 언저리까지 밀쳐올라왔지만, 생기부를 위해 억누를 수 밖에 없었다. 미투의 피해자들도 그동안 고발의 과정이 귀찮아서 참아왔던 게 아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 자신이 몸담아 왔던 사회에서 순식간에 매장당하고 미래를 빼앗기게 되는데, 어떻게 쉽게 대담해질 수 있겠는가.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 에서 험버트는 젠더권력, 나이권력을 이용해 롤리타를 착취한다. 험버트는 그와 롤리타의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본인이 아니라면 롤리타는 고아로서 더 힘겨운 상황에 처했을 거라고 위협을 한다. 어린 롤리타는 그저 분노를 삭이며 세뇌될 수 밖에 없었다. 롤리타는 극작가 퀼티를 만난 뒤 자신의 작은 사회가 비정상으로 가득찼다는 걸 깨닫고 험버트에게서 도망치게 된다.
우린 롤리타처럼 비정상을 정상이라 여기고 견디도록 프로그램되어 왔다. '원래 사회가 그렇게 굴러가는 것이니 네가 알아서 맞춰라, 너만 유별나게 엄살 부리는 거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더 나은 건지, 똑같은 건지, 네 주변인들이 유독 이상한 것 같다는 말도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정말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된 것이라면, 어째서 사방팔방에서 미투 라는 외침이 들려오는 걸까.
이번 미투 운동을 통해 나는 사회가 비정상으로 가득찼다는 걸 다시 한 번 직시했다.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비정상적인 시각은 좋든 싫든 태어나면서부터 무의식적으로 습득해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시각이 모여 권력을 형성해왔다. 미투 외침은 비정상을 무의식에서 수면위로 끌어올리려는 개인의 노력들이다. 우리 모두 그러한 노력이 필요한 이상, me too를 we too로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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