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 돌무덤조천읍 북촌리
강정효
"교문 쪽에서 총성이 들렸다.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은 채 싸늘히 식어갔다. 배고파 울던 아기는 죽은 어머니의 젖가슴에 매달려 젖을 빨고 있었다."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 없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 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형도 나도 울었다. 우익인사 가족들도 넋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중낮부터 시작된 이런 아수라장은 저물녘까지 지긋지긋하게 계속되었다.
- 현기영, <순이 삼촌>, 창작과비평사, 1979.
북촌리는 국제법상 전쟁 중일지라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제노사이드(genocide : 집단학살)의 대표적인 사례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1949년 1월 17일,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당한 북촌리 주민 대학살 사건. 이 사건은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쪽 밭에서 자행됐다.
이날 아침 세화리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리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입구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그 후 무장한 군인들이 북촌마을로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총부리를 겨누며 주민들을 전부 학교 운동장으로 내몰고는 온 마을을 불태웠다. 4백여 채의 가옥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