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년 기념관 이강년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기념관으로, 경북 문경 가은읍 대야로 1683(완장리 96)에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곧장 동상이 나타난다.
정만진
안내판을 읽었으니 지금부터는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을 읽는다. 비문은 배학보가 짓고 최원봉이 글씨를 썼다. 많은 빗돌의 글들이 흔히 그렇듯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도 내용을 파악하기가 아주 어렵다. 아니, 사실은 거의 해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조금 전에 읽은 안내판이 별도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 안내판을 따로 세워둔 관리인의 정성이 고맙다.
기념비의 비문을 사진으로 찍어 컴퓨터에 집어넣는다. 글자를 확대해서 읽어보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면 그냥 스쳐지나갈 비문의 내용도 잘 알게 된다. 특히 기념비 앞까지 찾아갔지만 비문은 읽어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던 분들에게 선열의 사상과 업적을 소개하는 보람도 느낄 수 있다.
읽기 어려운 빗돌의 문장을 독자들에게 정성껏 소개
필자는 임진왜란, 경술국치 등 어려운 시기에 목숨을 바쳐 나라와 겨레를 위해 싸웠던 선열들의 빗돌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일반 독자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옮겨 적는 일을 많이 해왔다. 선열들의 위대한 삶을 추념하는 필자 나름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윤덕 의사는 "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의거하여 강도 너희 놈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붙잡혔으니 오직 죽음을 바랄 뿐이며, 너희 놈들과는 아무 말도 하기 싫다"라고 적을 꾸짖으며 스스로 혀를 깨물어 말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의사는 그렇게 함으로써 일제의 취조를 거부했고 동지들을 지켜냈으며, 마침내 목숨을 잃는 순국의 길을 갔다. 어찌 필자가 비문을 옮겨적는 정도의 노고를 귀찮아하랴!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
정만진
"배달의 슬기로운 기백이 타오르는 이 푸른 언덕에 겨레와 강토를 굽어보는 높고 큰 봉우리가 있으니 이가 곧 의병대장 장윤덕 의사이시다.자, 호, 을사조약 |
자 : 옛날에는 이름을 소중히 여겨 임금이나 스승, 직계 어른 외에는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본명 대신 다른 이름을 지어서 불렀는데, 그 이름을 자(字)라 했다. 자는 집안 어른 등이 지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자가 생기면 성인으로 대우를 받았다.
호 : 자와 다른 호(號)도 있었는데, 호는 본명 대신 가볍게 부르는 이름으로 본인이 짓거나 벗들이 지어주었다.
을사조약 :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다. 이 조약이 맺어진 것은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이 이등박문에게 크게 협조한 결과로, 그래서 이 다섯 사람을 '을사5적'이라 부른다.
1905년에 맺어진 이 조약이 국가 사이의 통상적인 조약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강제로(勒) 체결된 것이므로 을사늑약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견해도 있다. 늑(勒)은 '강제로 무엇을 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을사늑약에는 조약이 애당초 원인 무효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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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872년 7월 예천읍에서 탄생하니 자는 원숙(元淑)이요 호는 성암(惺菴)이다. 일찍이 한학을 닦아 예천군 수서기(首書記)의 관직에 있을 때 저 망국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검은 구름은 하늘을 뒤덮고 도적의 발길이 삼천리를 짓밟으며 가슴에 품은 의분의 칼은 갈수록 서슬이 푸르렀다. 서기 1907년 4월 서울에 올라가 침략자의 우두머리와 매국역도의 주륙을 꾀하였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한의 칼날은 더욱 원수를 노려 늦춤이 없더니 7월에 격문을 사방에 뿌려 삼백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풍기 분파소를 쳐부수었으며 봉화의 소굴을 불태우고 문경, 용궁, 예천 등지로 피의 항쟁을 계속하던 중 특히 문경땅 갈벌 싸움에서는 이강년, 민긍호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왜적의 수비대와 경찰대를 섬멸시켜 민족의 의기를 천추에 떨쳤다. 이어 의사는 대구 수비대를 무찌르고자 의진을 이끌고 쳐들어 가다가 (9월 16일) 상주에서 대구 수비대와 격돌, 격전 끝에 총상을 입고 마침내 왜적에게 잡힌 몸이 되어 갖은 악형을 당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앞니로 혀를 끊어 맵고 곧은 절개를 지켰으니 이것이 곧 배달의 기백이요 화랑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