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어디에도 사소한 풍경은 없다

바람의 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등록 2018.05.30 21:48수정 2018.05.3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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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문 대문을 달지 않은 대문이다. 바람이 지나면 바람의 문이 되고, 사람이 오면 사람을 반기는 대문이 된다.
바람의 문대문을 달지 않은 대문이다. 바람이 지나면 바람의 문이 되고, 사람이 오면 사람을 반기는 대문이 된다.정덕재

바람의 문을 여닫는 문고리 사람을 반기는 얼굴로, 바람을 맞는 얼굴로 생각하라는 뜻에서 붙였다.
바람의 문을 여닫는 문고리사람을 반기는 얼굴로, 바람을 맞는 얼굴로 생각하라는 뜻에서 붙였다.정덕재

초인종이 없었다. 헛기침하는 것으로 인적을 알렸다. 때로는 마당에 들어서면서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예전에는 대부분 그랬다. 시골에서는 갑자기 방문을 쓱 열고 들어오는 이웃들이 많았다. 경계가 없었다. 대문이 있기는 했지만 낮에는 거의 열려 있었다.


작은 농막을 지은 뒤 대문을 만들지 말지 잠시 고심했다. 담장도 없는데 대문만 덩그러니 있는 것도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길 옆 아무데서나 들어왔다. 길과 마당의 구분이 있긴 했어도 담장용 조경수 하나 제대로 심지 않았기에 사방팔방이 드나드는 길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거처하는 공간이 있는 곳인데 나름의 질서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대문을 만들기로 했다. 여느 시골집에서 볼 수 있는 대문을 잠시 구상했지만 금세 지나쳤다. 방부목 몇 개로 이곳이 대문이라는 사실만 알리려고 얼개를 만들었다. 밀고 닫는 대문을 만들지 않아서 대문을 매다는 틀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나무 두개를 바닥에 박고 쓰러지지 않도록 위를 연결했다. 옆으로 지지대를 붙였다. 그게 전부다.

"대문은 없어?"

열고 닫는 문이 없으니 지나가는 동네사람이 한마디 거들만 했다.

대문의 이름을 '바람의 문'이라고 지었다. 쓸데없는 작명이라고 여길지 모르나, 농막생활 초보자는 객쩍은 의미라도 만들어 재미를 찾는 버릇이 있다. 물론 어쭙잖은 일이지만 자기만족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산 아래에 있는 농막이라서 바람이 잦다. 멀리 벌판에서, 옆 산에서 바람은 수시로 분다. 이맘 때 바람은 시원하고 겨울에는 한기가 가득하다.

바람의 문을 만들고 난 뒤에는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마당에 들어온다. 문이 없어도 대문인줄 안다. 지난 봄에는 길과 마당의 경계에 키작은 남천나무 몇 그루를 심었기 때문에 대문이라는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이 문을 드나드는 이는 수박 한 통 가지고 오는 아랫집과 떡 한 접시 들고 오는 윗집이 거의 전부지만, 그 과정에서 대문이라는 사실은 더욱 공고해졌다. 


어떤 두 공간이나 건축공간의 통행과 차단을 위해 만든 건조물, 문의 정의를 이렇게 말한다. 이 정의에 근거했을 때 내가 만든 문은 통행만 있을 뿐, 차단은 할 수 없는 구조이다. 나는 처마 밑에서 종종 그 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들어오고 나가는 마음. 보이다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을 상념들을 떠올린다.

돌이켜보면 문 앞에서 서성이고 주저했던 날들이 많았다. 마음의 문을 여는 방법이 서툴러 인연을 풀지 못한 날도 많았다. 스스로 문을 닫은지 모르고 지내온 날들도 셀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밤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도 가끔은 이 문 앞에서 멈추었다가 자신의 생애를 생각할지 모른다. 바람의 생애가 바람처럼 날리지 않을 때도 있을 터이니. 다음에 개명을 할지라도 아직은 바람의 문이다.
#바람의 문 #농막 #문고리 #바람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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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글쓰고 영상기획하고, 주로 대전 충남에서 지내고, 어쩌다 가끔 거시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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