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가 발표한 실업률 지표.
OECD
최근 언론보도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인 '제이 노믹스'에 대한 비판이 강한 편이다. OECD 보고서에서처럼 청년실업률이 개선되지 않고 있으므로 그런 비판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비판 속에 '불순한 비판'도 함께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경제현상을 잘못 이해하도록 오도할 수 있다는 게 문제점이다.
일례로, 모 일간지 16일 자 기사는 "전문가들은 앞에 놓인 과제부터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면서 "일자리 감소를 야기한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제이 노믹스에 대한 비판에 편승해, 소득주도 성장정책에 대한 불신을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다. 복지지출 증대나 기본소득제도에 대한 거부감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IMF 위기가 있었던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정부는 이윤주도 성장정책을 추구했다. 기업 이윤을 증대시켜 대중의 구매력을 높이는 것을 경제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 정승일 이사의 논문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 성장, 경제민주주의'에 이런 대목이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이윤주도 성장정책을 수행했고, 그 결과 자본 측 몫은 계속 증가하고 노동 측의 분배 몫은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니, 내수 소비수요(총수요)가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줄어들면서 경제성장 동력이 떨어졌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2017년 발행한 <KDF 리포트> 제20호 중에서.기업의 이윤 증가가 노동자의 임금 증가로 이어지고 이것이 대중의 구매력 증가로 연결되려면, 국가와 법률이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해주거나 노동조합이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의 이윤 증가는 사장 및 임원진의 소득 증가로만 이어질 뿐이다.
이제껏 한국에서는 노사분규가 터지면 경찰이 구사대 노릇을 해주는 일이 많았다.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에서는 노조 활동이 위축돼 있다. 한국 대표 기업에서 노조가 힘을 못 쓰는 현실은, 한국 전체적으로 노조가 약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런 나라에서 정부가 이윤주도 성장정책을 채택하면, 기업의 이윤 증가가 대중의 구매력 증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구조가 더욱 더 고착될 수밖에 없다.
그 같은 이윤주도 성장정책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나온 게 임금주도 성장정책이다. 노동자들의 임금 증가에 역점을 두는 방법으로 대중의 구매력을 높이는 전략이다. 최저임금 인상, 노동권 및 노조 강화 등을 통해 임금 증가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이윤주도 성장정책에 비해서는 나은 방법이지만, 이를 한국 현실에 적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금 인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서구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경제활동인구의 3분의 1를 차지하는 자영업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비근로 빈민들이 임금인상에서 소외되기 때문이다." -위의 정승일 논문 중에서. 노조 활동과 무관한 자영업자, 노조 활동이 불리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은 나라에서는, 노동권과 노조를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임금 인상을 유도하는 임금주도 성장정책이 한계를 띨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임금주도 성장정책의 틀을 수용하는 한편, 복지 지출을 통해 가계 소득을 높여줌으로써 대중의 구매력을 향상시키는 소득주도 성장정책이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제이 노믹스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이 소득주도 성장정책이다.
소득주도 성장정책이 청년실업률 증가를 초래하는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들이 있지만, 이 정책은 국민들이 실업 상태에 빠지더라도 최소한의 구매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국민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었을 때 특히 유용한 정책이다. 이런 정책이 실업률 증가를 초래한다는 비판은 잘못된 것이다. 복지지출 증대와 기본소득제도 확산을 우려하는 세력의 입장을 반영하는 선전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소득주도 성장정책은 이윤주도나 임금주도 정책보다는 늦게 나왔지만, 옛날 왕들이 가장 오랫동안 추구했던 경제정책과 본질을 같이한다. 역사적인 뿌리가 깊은 정책인 셈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군주들은 서민층 가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서민 가정이 조세를 납부하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농토를 지속적으로 경작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그래야 생산도 순조롭고 세금도 잘 걷히고 군대와 관료제도 제대로 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천재지변으로 민생 경제가 파산될 지경이 되면, 국고를 풀어 복지정책을 폈다. 생산 감소로 인한 소득 감소분을 복지 지출로 보충해준 것이다. 제이 노믹스의 소득주도 성장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대목이다.
서민 가계를 안정시킨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서민을 귀족의 횡포로부터 보호한다는 말이었다. 서민 가정이 파산해 귀족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말이었다. 서민들이 귀족의 노비가 되면 왕이 서민들한테서 세금을 거두거나 그들을 병사로 동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들은 서민 가계를 지키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일반 백성들이 재벌의 횡포로부터 가정경제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뒀던 것이다. 하지만, 왕들의 이런 정책은 대개 다 실패했다. 귀족세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서민 가계를 지키고자 뜻을 굽히지 않는 세력이 항상 있었다. 정도전과 조준 같은 고려 말의 혁명파도 그랬다. <고려사> 식화지(재정·경제 파트)에 따르면, 이들은 1391년에 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을 제정하면서, 지주가 농민의 경작권을 빼앗으면 곤장형을 부과하도록 하고 농민 자신도 경작권을 함부로 양도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농민 가정의 소득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배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