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1혜정 사진
박정우
혜정이가 아직 시설에서 생활할 무렵, 나와 함께 종종 외출할 때가 있었다.
혜정이는 가끔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면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른이 되면 할 수 있어."
스물을 훌쩍 지나 서른이 가까워오는 혜정이의 입에서 "어른이 되면"이
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간 혜정이가 살아온 시간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
다.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다'는 말로 얼마나 오랫동안 혜정이는 수많은 것들
을 포기해야 했을까. 혜정이에게 '어른이 되면'이라고 말해왔던 그 사람들은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언젠가 혜정이가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해보았을까?
- <어른이 되면> 중에서
-디큐에 이어<어른이 되면> 도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직접 책 소개를 해주신다면? "<어른이 되면>은 중증발달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열세 살 때 시설로 보내져 18년 동안 살았던 동생을 사회로 데리고 나와 함께 살아가면서 겪은 400일간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역시 다큐멘터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은데,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낼 자신은 없었어요. 그러다가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는데요, 다큐멘터리를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증발당장애인의 이야기를 슬프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볼 수 있는 영상이 처음이라는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저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저는 시설 장애인이 지역 사회에서 어울려 살 수 있는 하나의 상을 제시하고 싶었어요,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는.
그런 한 편 분명히 힘든 점들이 많이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은 일부로 감춘 것인지에 대한 질문, 혹은 혜영씨 자매는 행복하게 잘 지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 않느냐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정말로 존재하는 어려움이나 다양한 조건에 처해있는, 장애 당사자
그 가족들 나아가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층위에 대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영상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 저의 가족이나, 제가 왜 이렇게 혜정을 애틋하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배경, 다큐 이후의 삶, 저희 자매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연결고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책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고요."
- 잘 보여진 것 같나요? "악!!! 그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웃음) 다만 다큐멘터리를 보신 분들은 그 연장선에서 좀 더 깊이 있게 읽을 실 수 있을 것 같고, 보지 않으신 분들은 그 나름대로 새롭게 읽으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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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을 보면서 혜영씨가 이야기를 잘 만든다는 생각도 했는데요, 어린 시절 - 시설에 들어가게 된 사연 - 그러다가 어느 순간 혜정을 시설에서 데리고 와야겠다고 결심하는 이 흐름이 굉장히 영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평범한 소시민인 주인공이 어떤 일을 계기로 각성하는 그런 구성 같았어요. 그래서 <어른이 되면>은 혜정과의 소소한 일상을 보여주는 에세이적인 면이 있지만, 묵직한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인문과학서이기도 하면서, 기승전결이 잘 짜인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책 초반에 등장인물 소개도 있고요. 의도한 부분인가요?"저에겐 그런 글쓰기가 불가피 했던 것 같아요. 저라는 사람 자체가 인생을 이해하는 방식이 이야기라는 형태에 가까워요. 살면서 아주 힘든 순간이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나는 지금 어떤 이야기의 어디쯤에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특히 혜정은 저의 그런 부분의 시초이자 매우 긴 시간동안 제 삶의 중요한 화두였기 때문에 어떻게 혜정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 저에게 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저와 혜정에게 있어 1부가 막 끝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해요.(웃음) 스핀오프 같은 거죠. 30여 년에 걸쳐서 우리가 왜 함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