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공항에서 (오른쪽부터 백범 암살범 추적자 고 권중희 선생, 진천규 기자, 박도 기자).
박도
"교육자는 그 제자들이 말한다" 흔히들 말한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하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교육자는 무엇으로 말할까? 아마도 그 답은 "교육자는 그 제자들이 말한다"일 것이다. 정말 나는 그가 자랑스럽다. 지난해 가을부터 전쟁기운이 가득했던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 그가 신의주 평양 등을 둘러보고 "북녘은 평온하다"는 소식을 남녘으로 전할 때 우리 모두는 안도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46년 전인 1972년 3월 1일 서울 오산중학교 운동장에서 처음 만났다. 해마다 오산(五山)학교는 국경일인 삼일절 날 개학식 입학식을 치렀는데 이는 오산 후학들이 학교를 세우신 남강 이승훈 선생을 기리고자 하는 갸륵한 정성이었다.
나는 그때 신임교사로 중1 신입생을 담임 맡았다. 가장 신출내기라고 1-12반에 배정되었다. 그날 나는 운동장에 모인 70명 신입생 모두를 하나하나 껴안아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맛보았다. 그때 진천규 기자도 내 반 학생이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 <한겨레신문>을 보면 사진 밑에 진천규 기자라는 이름이 보였다. 혹시 그가 아닐까 하는 기대로 전화를 하자, 바로 내 제자 진천규였다. 우리는 한 밥집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그가 사진기자가 된 것은 나 때문이라고 하여 깜작 놀랐다.
나는 반 학생들의 소풍 때나 그밖에 행사 때는 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앵글에 담곤 했다. 그게 반 학생들에게는 멋지게 비친 나머지, 그는 부모에게 졸라 카메라를 입수하여 취미 생활하던 게 평생 직업이 되었다고 말했다.
2004년 1월 31일 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권중희 선생을 모시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갔다. 그때 한 독자가 권 선생 항공표를 구해 준 바, 로스앤젤레스를 경유케 되었다. 그런데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출국 전 내 집으로 전화가 왔다. LA 공항에 나오겠다는. 사실 권 선생과 나는 토종 한국인으로 영어 한 마디조차 할 줄도 모른다.
우리 두 토박이 늙은이가 LA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데 누군가 "선생님!"하고 불렀다. 꺽다리인 그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는 나를 취재하고, 나는 그를 취재하는 사제의 열띤 취재장이 되었다. 그의 덕분으로 미국 입국 때도, 돌아올 때도 LA 동포들이 조촐한 환영회와 환송회를 해줘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