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스페셜 <아기, 어떻게 낳을까?>편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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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통주사도, 촉진제도 맞지 않고 온전히 모든 고통을 느끼며 출산을 경험했다. 당시 무통주사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무통주사도 약품이기에 부작용이 있을 수 있었고, 일본에서 무통주사를 맞은 산모가 여럿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막연히 두렵기만 했다. 출산만큼 주사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나는 차라리 진통을 선택했다.
임신 막달까지 직장에 다니느라 출산 준비를 충분히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틈틈이 출산 관련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챙겨봤는데, 그때마다 자연분만과 모유 수유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숱한 서적과 영상물은 산도를 통과해 나온 아기들이 소위 '면역 샤워'를 해 더 건강하고, 모유 수유를 오래할수록 아이의 두뇌 발달이 좋다고 강조했다.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선택을 고민할 겨를없이 '자연분만+모유 수유'를 해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당시 내가 했던 그 모든 선택이 정녕 나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내겐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다. 아이를 품은 엄마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보이지 않는 모성신화의 압박에 눌려 정해진 답을 골랐을 뿐이다.
고통은 축소되고 행복은 과장된 엄마들의 이야기
엄마가 되고 나서 느낀 첫 번째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고, 내가 알고 있는 것조차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갔다.
자연분만과 모유 수유가 얼마나 아이에게 좋은지는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그 두 개의 과업을 해내는 엄마가 얼만큼의 고통과 고난을 견뎌야 하는지는 생략돼 있었다. 고통이 축소되고 행복은 과장된,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 시점에 맞춰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먼저 엄마가 된 여성들의 침묵을 원망했다. 왜 이런 처참한 고통을 '자연스러운' 일인 양 이야기했을까. 엄마의 모성은 신성한 것이기에 충분히 희생할 수 있고, 엄마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역사를 반복해온 여성들이 미웠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여성의 삶에서, 특히 엄마의 생애주기에서 여성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었다는 현실. 여성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도록 남성들의 권력이 작용해온 역사. 여성의 일도 남성의 기준에서 해석되는 구조. 엄마보다 아이가 먼저인 줄 알고 살아왔기에 여성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선택에 빠진다는 한계. 여전히 우리는 여성의 존재를 지우고, 철저하게 아이의 엄마로, 혹은 남편의 아내로서 정해진 답을 선택하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지난해 가을 중국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건이 떠오른다. 병원 5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산모가 있었다. 태아의 머리가 커 자연분만이 어렵기 때문에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남편이 끝까지 자연분만을 고집하며 수술 동의를 해주지 않아서였다. 사랑과 신념이 가하는 은밀한 폭력은 결국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이영표 위원은 자신의 발언이 뒤늦게 보도돼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4일 페이스북에 장문의 해명 글을 올렸다.
"출산 몇 시간 전 전화통화에서 무통주사를 맞고 출산하자는 제 의견에 아내는 무통주사를 맞게 되면 아이가 힘들다며 끝내 주사 없이 첫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 아내는 이번(둘째 출산)에도 무통주사를 맞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집에서 기다리는데 주사를 맞으면 출산 시간이 길어진다는 이유였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마음을 가진 아내 자체가 축복입니다.)
(...) 셋째를 출산할 때쯤 저는 창세기를 읽고 있었고 출산을 코앞에 둔 터라 유독 출산의 고통을 언급한 부분에 눈길이 갔습니다. 종종 신앙적인 생각을 서로 나누는 우리 부부에게 첫째와 둘째에 이어 셋째를 출산할 때 주사를 맞지 않는 일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긴 하지만 길게 고민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요약하면 결국 아내가 선택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무통주사를 맞지 않은 아내를 가진 자체가 "축복"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는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듯하다.
무통분만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