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산( 장지락, 1905~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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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과 교분이 깊었던 에드거가 마오쩌둥을 취재하고 있을 때 웨일스가 인터뷰한 혁명가 가운데 조선인 김산(본명 장지락)이 있었다. 평북 용천 출신으로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에서 사회주의자가 된 이 청년은 김원봉·김성숙과 함께 조선혁명청년연맹을 결성하고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족독립당을 조직한 이였다.
1927년에는 김산은 중국인들과 함께 광둥(廣東) 코뮌 건설에 참여했다. 조선인의 중국 공산당 입당을 주도하던 김산은 1930년과 1933년 두 차례에 걸쳐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 스파이로 의심받은 그는 다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지 못했다.
1936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한 김산은 옌안의 군정대학에서 홍군을 가르치고 있었다. 웨일스는 두 달 동안 22차례에 걸쳐 김산을 인터뷰하여 이를 바탕으로 김산의 자서전 <아리랑>을 완성했다. <아리랑>이 웨일스와 김산이 공동 저자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웨일스는 아마 김산에 깊이 매료된 듯 보인다. 조국을 되찾기 위한 도전과 시련, 그 가운데 담대한 혁명가로 성장한 식민지 청년의 모습과 그가 품고 있는 활화산 같은 열정에 웨일스도 흔들렸던 것 같다.
김산의 죽음, 그리고 <아리랑>(1941) 출간
그러나 혁명가 김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죽음이었다. 1938년 중국 공산당이 김산을 반혁명죄와 간첩죄로 처형한 것이다. 중일전쟁이 발발(1937)하고 난징이 함락된 이후,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된 웨일스는 남편과 함께 필리핀으로 가 〈아리랑〉을 써 1941년 미국에서 이 작품을 출판했다. 이 책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민족독립 운동을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공산혁명을 이루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극동에서의 교두보인 중국을 공산세력에 내준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면서 웨일스의 중국 저술은 대중에게 잊혀가고 있었다.
1949년 웨일스는 에드가 스노와 이혼하고 17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냈다. 그는 고향인 코네티컷으로 돌아온 뒤에는 계보학에 몰두해 뉴잉글랜드가 영국의 식민지로 바뀌는 과정을 천착한 역사서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