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나무를 켜던 기계는 더이상 작동하지 않고 멈춰있다.
박경미
한편 합덕읍 서동리에서 나고 자란 3대 운영자인 김준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합덕제재소 풍경을 떠올렸다. 10여 명의 많은 인부들이 커다란 나무를 자르던 모습, 나무를 자르는 데 쓰던 기계, 기계에서 나오던 무수한 톱밥과 나무의 냄새까지 아직도 생생하다.
"하루 종일 나무를 잘랐어요. 기계로 나무를 자르면 톱밥이 어마어마하게 나와요. 톱밥 때문에 기계 밑에 구덩이가 좀 깊게 파져 있는데, 중학생 때 주말이면 친구들과 종종 구덩이에 쌓인 톱밥들을 퍼내곤 했어요. 친구들과 함께 하는데다 용돈까지 받으니 꽤 재밌게 했죠."
군대 제대 후 김 대표는 여행사 일을 배우기도 했고,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으며 태안에서 숙박업을 하기도 했다. 사회경험을 쌓는다며 2~3년간 곳곳을 다니며 일하던 그에게 아버지는 제재소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당시 큰 형은 아버지 밑에서 기술자로, 작은 누나는 경리로 일하고 있었기에 그도 자연스레 제재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어린 시절 즐거웠던 추억과 달리 김 대표는 제일 밑바닥부터 일을 배우면서 고생했다. 나무를 다루는 작업은 굉장히 힘들었다. 아무리 두꺼운 털장화를 신어도 발이 시려울 정도로 난방이 안 되는 창고에서 나무파렛트를 만들었고, 인근 산에서 벌목을 하고는 산 속으로 기계를 들일 수가 없으니 직접 통나무를 메고 나오기도 했단다. 수백 그루의 나무를 하루 종일 재단하고 켜면 손가락이 굳어 제대로 펼 수조차 없었고 척추는 휘어 허리통증을 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