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집(2010년)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1년전 고향집의 모습
이정국
아버지가 그런 어머니를 보며 한 마디 하셨다.
"뒤 안(뒤뜰)을 스무 바퀴만 돌아!"
그러자 어머니는 아버지 말대로 뒤뜰을 두 바퀴 정도 도시다가, 또 다시 마루를 닦더니 밖으로 나가시려고 하였다. 이미 대문을 열쇠로 잠가 뒀기 때문에 어머니는 대문 앞에 서서 계속 문을 열려고 애썼다. 내가 다가가니, "문을 열어야지" 하고 웅얼거리셨다. 할 수 없이 문을 열어 드렸다. 밭에 가신다고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까지 쓰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를 부축해 동네를 가로질러 우리 밭으로 모시고 갔다.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께서 안 돼 보이는지 혀를 찼다. 어머니는 아직 마르지 않은 밭의 이슬 길을 걸었다. 그 밭은 어머니가 평생 고구마 등 농작물 기르고 가꾸던 곳이다. 나는 어머니와 그 밭 주위를 한 바퀴 돈 뒤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막내 말로는 어머니는 매일 그 밭에 가신다고 했다. 그래서 하루는 그곳에 주저앉은 어머니를 막내가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피곤해서 방에 누우신 듯하더니, 다시 일어나 마당으로 나와 뭔가 일거리를 찾으시다 '션듀'라는 쥬스를 마시고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신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수건을 머리에 쓰시더니, 또 대문을 열고 나가려하시며, 나에게 "문 열어 주라!"라고 계속 얘기하신다.
아버지께서 '그냥 열어 주라'로 하자, 나는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또 밭을 한 바퀴 돌았다. 저 쪽 길에서 평소 친했던 동네 아주머니가 "박실댁!'하고 어머니 택호를 불렀지만, 어머니는 별다른 반응도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 오셨다. 어머니는 땀을 흘리시며 잠시 누워계시다 일어나 이것저것 먹고 마셨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부르며 어머니에게 따라 부르라고 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 집이여..."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란 노래는 아버지 회갑 때 아버지가 부르시던 애창곡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징용에 끌려가 고생하시고, 6.25전쟁 때는 참전 군인으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신 아버지는 술 만 드시면 그 노래를 부르시곤 했다.
그 노래를 어머니가 웃는 듯 우는 듯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신다. 아버지가 노래 부르다 말고 갑자기 나에게 '너 결혼 언제 할래?'라고 물으셨다. 나는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31살이지만, 아직 감독 데뷔도 못하고, 백수나 마찬가지인 나로선 결혼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