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살 무렵 어머니나중에 어머니의 영정 사진이 되었다.
이정국
1987년 12월 16일 (수)
아침 일찍 성내동 대순종단에서 대선 투표를 하고, 급히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러 갔다. 고향 집에 가니 어머니가 안방에 누워 계셨다. 직장에 다닌 큰 형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울산에서 온 여동생만 남아 있었다.
"엄니, 저예요. 정국이 왔어요."
"어이, 자네 아들 왔네."
아버지가 옆에서 거들었지만, 어머닌 이미 한쪽 눈이 반쯤 감겨진 상태로 나머지 한쪽 눈동자만 초점을 잃은 상태로 아예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어머니 머리는 남자 머리처럼 짧게 깎여 있었다. 머리가 너무 산발이라 아버지가 직접 깎아주셨다고 한다.
"이젠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어머니 머리맡에 앉으시더니 가져온 그릇에 우유를 쏟아 붓고 숟가락으로 떠서 어머니 입에 넣어 먹이셨다. 어머니가 삼키질 못하시자 아버지는 손으로 입을 움직여서 넘어가게 했다.
저녁에 티브이에서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하는데, 노태우가 1위를 하고 김대중이 3위를 하자, 아버지와 많은 동네사람들이 크게 실망했다. 난 티브이를 끄고, 누워계신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1987년 12월 17일 (목)
마을 사람들이 종종 와서 어머니를 보고 가셨다. 모두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애처로워 하셨다. 나는 작은 방에서 책을 보는 둥 자는 둥 하다가 아무도 없을 때 큰 방에 들어가 어머니를 말없이 내려다보곤 했다. 이젠 거친 호흡만 하실 뿐, 거의 생명이 없는 것과 같았다. 여동생 딸인 어린 조카 지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1987년 12월 18일 (금)
답답했다. 마치 옆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길 기다리는 것만 같은 내 모습이 참을 수 없었다. 빨리 서울에 올라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번에 쓴 시나리오를 여기저기 보여줬는데, 과연 영화화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일단 서울에 올라가 그것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께 얼른 갔다 바로 돌아온다고 말씀 드리고 집을 나섰다.
서울 가는 길에 광주에 들렀는데, 시내에선 노태우 당선에 대해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이 부정선거 반대데모를 하고 있었다. 광주 시내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사재기 때문에 라면이 동났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나는 고속터미널 근처에서 최루가스를 마시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에 도착했다. 강남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걱정되어 얼른 공중전화로 가서 서울 큰형에게 전화했다.
"형, 혹시 시골에서 무슨 연락 없었어?"
"응, 연락 왔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뭐 정말?"
"아까 7시쯤 돌아가셨다고 전화 왔더라."
순간 나는 아! 하고 회한의 외마디를 지르고 말았다. 심한 자책감으로 멍하니 터미널 지하상가를 걸었다. 어머니 임종을 못 보다니... 밤늦게 큰형과 서울역에서 만나 열차로 시골로 내려갔다. 좌석표가 없어 입석표로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