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기록된 진덕여왕은 키가 7척에 이르는 여인이었다. 보통의 남성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던 셈이다.
삽화 이찬욱
여러 차례의 외침을 극복한 여왕
사실 고대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이나 예술작품엔 크건 작건 과장이 섞여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는 어지간한 10대 청소년의 몸무게와 맞먹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가벼운 나무젓가락 다루듯 한다. 뿐인가. <수호전>의 무송은 맨주먹으로 거대한 식인 호랑이의 머리뼈를 부숴버리는 초인적 괴력을 보여준다.
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이 연출한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4대 왕 크세르크세스(Xerxes·재위 BC 486∼BC 465)는 키가 진덕여왕의 2배쯤 되는 4~5m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 옛날 왕이나 영웅호걸에 대한 묘사가 마냥 과장스럽기만 한 것일까? 진덕여왕의 경우를 꼼꼼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앞서 언급한 649년 침공 외에도 진덕여왕은 즉위한 직후부터 백제와 고구려 군대의 끊임없는 공격에 맞서야 했다.
진덕여왕이 명령하고 김유신이 실행한 방어작전은 성공적이었다. 647년에는 무산성과 감물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격퇴했고, 이듬해에도 서라벌 서쪽을 노리는 백제 무장 의직(義直)으로부터 신라의 10개 성을 지켜냈다.
이강식 교수는 위의 논문에서 "사촌누이를 반대한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겪으며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한 상황 속에서 즉위한 진덕여왕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신라 국정을 개혁해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져야한다는 주요한 과제를 안고 탄생했다"고 쓰고 있다.
안으로는 반란의 잔당을 진압하고, 밖으로는 여러 차례의 외침을 효과적으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진덕여왕의 용기와 군사적 능력에 후한 점수를 주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여왕의 관심은 군사 조직의 정비에까지 이어져 651년에는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했고, 652년엔 궁병(弓兵)들이 주축이 된 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 사이에선 진덕여왕이 "김유신과 김춘추(604~661)가 허수아비로 세워놓은 왕"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7세기 중반 신라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어떤 잣대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주장은 힘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 아래와 같이 정반대로 말하는 학자도 존재하니까.
"선덕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안목을 키운 진덕여왕의 상황 판단능력과 정치력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전쟁에는 김유신을 앞세우고,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던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외교에 적극 활용했다. 이것만 봐도 진덕여왕의 용인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진덕여왕릉.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이 경주시 현곡면 소나무 숲에 잠들어 있다.
이용선 제공
외교에서도 만만찮은 능력 선보여
백제와 고구려의 침탈에 용기 있게 맞선 통치자였던 진덕여왕은 '외교'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보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강식 교수의 논문 <신라 세 여왕의 삶과 경영>은 진덕여왕의 외교 전략을 '자주화'와 '대당 외교의 병행'으로 요약한다.
'진덕여왕은 즉위 원년(647년) 연호를 태화로 고쳤다. 그리고 같은 해 초겨울 신궁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신라의 천신교 의례를 수행함으로써 자주성을 표방한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제화 전략도 필요했다. 이를 위해 진덕여왕은 '중국(당나라)과의 외교'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교수는 신라와 당나라가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에 시달렸던 신라와 고구려 침략에 두 번이나 크게 실패한 당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다."
여기에 이런 문장도 덧붙이고 있다. "진덕여왕의 대당 외교 성공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통일을 완수하게 되는 발판을 만들었다."
8년의 재위 기간 동안 국방과 외교 분야에서 진덕여왕이 이룬 일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에 관한 보다 정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신라를 읽는 키워드 '골품제' |
뼈에도 품격이 있다?
신라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타고난 혈통과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부모를 통해 얻게 되는 지위가 한 사람의 평생을 지배했다. 언필칭 골품제(骨品制)다.
골품제의 최상위 계급은 성골(聖骨). '성스러운 뼈'로 해석 가능한 성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왕의 핏줄을 가진 사람을 지칭했다. 신라의 두 번째 여왕인 진덕은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이었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사회 구조와 신분제>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실려 있다.
'골품제는 신라의 역사와 사회를 들여다보고 살피는 창(窓)과 같은 역할을 한다. 동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비슷한 시대의 외국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신분제였고, 신라 사회를 살아갔던 많은 사람들의 정치·사회 활동과 일상생활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던 법제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다. '성골-진골(眞骨·부모 중 한 사람이 왕족의 혈통인 사람)-6두품-5두품-…1두품'으로 나뉜 골품제 아래서 자신의 계급이 확정되면 오를 수 있는 벼슬의 상한선에서부터 입는 옷, 사용하는 생활용품, 집을 지을 수 있는 규모까지가 함께 정해졌다.
심지어 여성들의 속치마와 장신구 색깔에까지 골품제가 끼어들었다. 현대인의 상식으론 이해가 힘들다. "너는 성골이 아니라 6두품이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샤넬 립스틱을 쓰면 안 된다"고 한다면 21세기 여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중앙집권제 국가로 성장하던 신라가 지역 토호들의 세력을 흡수하며 만들어진 골품제는 많은 폐단을 낳기도 했다.
능력과 노력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출신 성분'을 인간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몇몇 역사학자들은 신라 멸망의 원인을 '골품제가 야기한 차별'에서 찾기도 한다.
골품제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기엔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런 사회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 옛날 신라를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는 걸 부정하기 힘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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