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선수의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 4면 기사(좌)와 동아일보의 지방판 조간 2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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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제10회 세계올림픽대회가 열렸다. 올림픽의 하이라이트는 마라톤대회이고, 한국인 손기정 선수가 2시간 29분 19초의 기록으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우승하였다. 남승룡 선수는 3위에 입상하였다.
베를린으로 출발하면서부터 기대를 모았던 손기정 선수가 세계 최초로 2시간 30분대의 벽을 깨고 우승하자 식민지 시대일망정 한국 국민들은 크게 환호하였고 신문들은 대서특필을 하고 호외를 발행하여 이 쾌거를 널리 알렸다.
손기정이 비록 일본대표의 자격으로 출전하였지만 그의 승리는 패배와 좌절감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에 큰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총독부가 눈을 부릅뜨고 한국민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차에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는 『조선중앙일보』가 8월 13일자 조간에 손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일본국기)를 지운 채 발행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몰랐던지 그냥 넘어갔다.
당시 조선에는 민간지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조선일보』 그리고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가 발행되고 있었다. 동아는 김성수, 조선은 방응모가 사장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1년 11월 27일 『'중외일보』의 지령을 이어받아 창간한 신문으로 경영난으로 한동안 휴간했다가 사원들의 투표로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감한 여운형을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여운형은 1933년 3월 7일자로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바꾸어 발행하면서 시종 민족주의적 논조를 유지하여 국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1936년에는 하루 32,782부씩 발행하여 최초로 『동아일보』의 31,666부보다 약간 앞서기도 했다. 명실공히 최고 발행부수의 신문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민족적ㆍ사회적 범죄자나 총독부에 타협한 변절 인물, 특권층의 비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유명한 친일파 박희도와 최린의 축첩 행각 등 이들의 비열한 사생활에는 한 치의 용서가 없었다. 반면 학생ㆍ노동자ㆍ농민ㆍ빈민 등에 대한 지지ㆍ원조는 당대 신문 중 제일이었다.
한강유역의 홍수와 낙동강 수해 때는 여운형 사장이 직접 침수 가옥 안으로 들어가 인명을 구하고 구호품을 나눠 줄 정도였다. 신문사 사장이 체면이나 겉치레를 차리지 않고 직접 일선에 나서서 민중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다.
여운형이 지휘하는 이 신문은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친일 변절자들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했다. 국내 지도적 인물들의 총독부 당국과의 타협을 경고했고, 이미 그 회유정책에 넘어간 인사들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이 신문이 국민에게 인기가 있었던 배경이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조선일보』 광산왕 방응모는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덕꺼덕,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이란 내용이 잡지에 실리고 세간에 나돌았다.
『조선중앙일보』는 총독부의 직ㆍ간접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면서 신문을 제작하였다. 1933년도 송년사에서 예리한 국제정세의 안목을 살필 수 있다.
지나간 1933년은 실로 세계사의 발전방향을 확연하게 결정하고 말았다. 국제 자본주의의 시금석인 세계경제회의는 무참하게도 실패하여 고립적 국가주의 경제로 박차를 더하게 하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수호신 같이 받들은 국제연맹도 일ㆍ독 양국의 탈퇴로서 후광을 잃어 도리어 제국주의 국가 간의 모순을 폭로시키고 말았다.(중략) 블록의 방공이 격렬해짐에 따라 국가 권력의 정면충돌을 피치 못할 위기에 임해 있다.(중략)
우리는 극동 방면에 더욱 주목을 크게 한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을 싸고도는 열국의 관계는 극히 험악해 가는 터이니 일ㆍ미 간의 선박 경쟁은 대전 전의 영ㆍ독 간의 그것과 다름이 없고 일ㆍ러간의 육군 경쟁도 역시 당시의 독일 대 불ㆍ러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중략)
영국이 전비를 최대한으로 확장하여 가는 품은 1914년의 대전 직전과 다름이 없다. 벌써 노만 국경에는 군사상 경계가 느끼게 된다. 폭풍우의 전야 같은 1933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스스로 단속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