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공개] 문동환 목사의 반려자 문혜림 여사가 수감된 남편의 인권 보호를 촉구하는 서신고 문동환 목사의 반려자 문혜림 여사가 1977년 8월 19일 작성한 서신. 이 서신은 미국으로 보내졌으면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1977년 8월 19일
한국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여러분들의 도움을 호소하고자 합니다. 저의 남편(문동환 박사)은 모두가 기대했던 바와 달리 8월 15일에 석방되지 못했습니다. 모든 정치범들은 민주화 투쟁을 한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고 회개하는 내용의 진술서를 작성해야만 석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에 따라 결연히 행한 일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성과 회개를 한다는 진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석방되어야 합니다.
나는 카터 대통령이 미군철수에 대한 보상으로 한국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늘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앤드류 영은 "우리는 독재자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만일 미국이 미군철수와 함께 한국 정부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늘린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억압은 훨씬 더 심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인권을 회복시키고, 기본적 자유를 되찾아야만 합니다. 독재자에 대한 보상차원에서 군사적 원조를 늘리자는 것입니까? 저는 이러한 정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최대의 적은 군사적 원조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의 진전입니다.
만일 인권이 진정으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원조 증가에 반대하는 서신을 가능한 많이 보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아직까지 31명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을 뿐 수백 명의 정치범들은 여전히 수감 중에 있습니다. 이는 단지 카터 대통령을 만족시키기 위한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 발의 피'에 불과한 사면조치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저의 남편은 여전히 독방에 구금되어 있으며, 단백질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빵, 면, 밥 등으로 구성된 열악한 식단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하루 30분의 운동시간을 제외하고는 햇볕을 쬘 수도 없습니다. 그의 혈압은 150/110인데, 최저 혈압 수치가 상당히 높습니다. 또한 그는 요통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의사의 말로는 신장 쪽 문제의 징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내 남편의 건강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남편은 15일 이후로 오로지 쌀만 섭취하며 절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미국 대사관과 이와 관련해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이와 같은 금식은 종교적인 수련일 뿐이며 그는 아무런 요구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정보원으로부터 그가 진술서 작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문혜림
편지를 보면 당시 수감 중이던 문동환의 안위를 걱정하는 문혜림 여사의 심정과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서 노력하는 활동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이 합쳐져 문동환은 형인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등과 함께 1977년 12월 31일 석방됐다.
문동환은 그 직후 1979년 8월 YH 사건으로 다시 수감됐다가 12월에 석방돼 1980년 봄 세계교회연합회의 참석차 독일로 출국했다. 그런데 그 기간 한국에서 광주항쟁이 발생했고, 문동환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자 그는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문동환, 김대중 구명-민주인사 석방 위해 미국서 노력하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자신들의 쿠데타와 광주항쟁에 대한 유혈진압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그래서 주동자로 몰린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문익환 등 수 많은 민주화 인사들에게 중형을 내리는 등 가혹한 탄압을 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신군부의 총칼에 죽임을 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죽음같은 침묵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전두환 정권의 폭주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의 압력이 필요했다. 그 당시 미국, 일본, 유럽 등 당시 한국 정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국가들의 주요 인사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고 미국에 있던 문동환 역시 이와 같은 흐름에 동참했다.
당시 문동환은 '김대중을 비롯한 한국 민주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Campaign To Free Kim Dae-Jung and The Other Democratic Leaders)을 조직해 공동의장을 맡았다. 당시 이 조직에는 미국의 국회의원, 학자, 종교인 등 저명한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모임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이는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에도 큰 압력이 됐다.
짧은 기간 안에 저명한 미국 인사들이 대거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1973년에 조직된 재미교포 민주화 단체인 한민통 미국본부의 활동과 관련이 깊다. 1973년 김대중이 1차 미국 망명할 당시 조직한 한민통 미국본부에는 종교인, 언론인, 지식인 등이 참여하고 있었으며 문동환 역시 이들과 관련이 있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한국 민주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Campaign To Free Kim Dae-Jung and The Other Democratic Leaders)에 문동환과 함께 공동의장으로 참여한 미국 측 인사는 당시 미니에폴리스 시장으로 재직 중이던 도널드 프레이저(Donald M. Fraser)였다.
도널드 프레이저는 1963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 연방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미국의 인권정책 수립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민주적 활동을 위한 미국인들'(Americans for Democratic Action)을 이끌기도 하는 등 제3세계 인권 문제와 관련해 많은 활동을 전개했었다.
문동환과 도널드 프레이저는 '김대중을 비롯한 한국 민주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한 운동'(Campaign To Free Kim Dae-Jung and The Other Democratic Leaders) 공동의장 자격으로 전두환 대통령에게 1980년 11월 24일 편지를 보냈다. 당시 김대중은 9월 17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1월 3일 2심에서도 사형선고를 받는 등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