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보광사 뒤 소나무 숲이 소나무 숲으로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꿈에도 몰랐다. 보광사가 보존됐으니 가볍게 산불이 스쳐지나갔다고 믿었다.
정덕수
1차와 2차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송고할 때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던 일들이 숙소를 구하고 나서야 생생하게 그려졌다. 잠시 숨을 고르며 스마트폰 녹음기를 작동했다. 그리고 생각난 모든 걸 녹음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분명 이 녹음이 후속기사를 쓸 때 요긴하리라 생각했다.
"소방차는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거야? 왜 여긴 안 오는데?"
"이럴 때 군인들이라도 나와야 되는 거 아냐? 도대체 군인은 뭐하는데?"
"아이고, 저걸 어째 결국 불이 붙었잖아. 아이고 이걸 어떡해? 어떻게 하냐고?"
대답해 줄 수 없는 피맺힌 절규… 소방인력인들 왜 지원하고 싶지 않겠나. 어딘가에서 더 큰 피해를 미리 차단하려 고군분투 했겠지. 하지만 지금 이들로서는 누군들 원망스럽지 않겠나. 그게 스스로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종적인 반응 아니겠나.
남의 일 같던 절망적인 사건이 현실로 닥치면 사람은 먼저 원망부터 한다. "왜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느냐?"라거나 "내가 뭔 죄를 지었다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와 같은 반응… 그리고 흥정을 한다. 그게 신이거나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누군가와 "이번만 도와주면 앞으로 정말 잘 하겠다"는 약속은 곧 흥정 아니던가. 그리고 절망 끝에 체념하기에 이른다.
지난 밤 연세 드신 아주머니를 부축해 언덕을 내려가 안전지대로 피신하게 도와드렸다. 당장 집으로 불이 옮겨 붙을 위급한 상황에서는 속초시문화회관 직원들한테 정확하게 물을 뿌려야 할 위치를 일러주며 함께 물을 뿌렸다.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했던 경험과 속초소방서에서 받았던 화재진압교육이나 위기대처훈련이 도움이 됐다. 하지만 다시는 치르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저 집 지금 물 뿌리지 않으면 열기 때문에 곧장 불이 붙어요. 타이어를 왜 저기다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타이어에 불이 붙었군요. 타이어에 붙은 불은 끄기 힘들지만 그 옆 벽에 뿌리면 열기는 막아 불은 안 날 겁니다."
그 순간 누군가 근처 밭에 꽂혀 있던 철근 하나를 뽑아들더니 불붙은 타이어를 끄집어내려고 접근했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자칫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그 집 주인은 내가 보는 앞에서 한참 전에 피신했다. 집 주인도 아닌 사람이 그 순간 그렇게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치울 수만 있다면 좋지만 안 되면 곧장 나와요. 그리고 혹시 빈 캔 같은 거 보이면 바로 피신해요."
경험으로 내가 그에게 일러줄 수 있는 안전한 행동수칙은 그것뿐이다. 답답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빈 캔'이라 말한 건 스프레이 방식으로 사용하는 다양한 걸 말한다. 헤어스프레이와 모기약통, 녹 제거제 등 얼마나 많은 캔을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나. 사용한 빈 캔이 불 속에선 엄청난 문제를 일으킨다.
땅을 파헤쳐 숨은 불씨까지 찾아내야
녹음을 마치자 걸음을 옮겼다. 새까맣게 재로 변한 땅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연기처럼 재가 날렸다. 먹물을 뒤집어 쓴 모양으로 서 있는 소나무껍질은 손으로 건드리니 맥없이 부서졌다. 정말 이렇게 오랜 시간 불길이 머문 숲의 흔적은 난생 처음 목격한다. 대체로 불길은 표면을 스쳐 지나가기에 산불이 지나갔어도 이 정도로 땅거죽까지 태운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