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생가 입구어린이도 알아볼 수 있게 한글로 쓰면 좋을 것을 한자로 '박차정의사생가'라고 되어 있다(왼쪽), 오른쪽은 생가 입구인데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로 좁다. 입구에 담장은 공터와 물려있어서 사적인 토지 문제가 아니라면 헐어서 조금 입구를 넓히면 좋겠다. 꽃그림으로 그린 담장 옆 좁은 길로 들어서면 박차정 생가가 나온다
이윤옥
총을 든 박차정... "그녀는 당당한 의사입니다"
'전시장'이라고 했지만 작은 방 2칸이 전부다. 이곳이 박차정(1995, 독립장) 의사 생가였던 만큼 큰 공간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유관순 열사처럼 독립장(2019년 대한민국장을 새로 추서받음)을 받은 의사(義士)를 기리는 공간으로는 협소하고 어설퍼 보인다. 생가로 들어가는 골목은 주차는커녕 사람하나 들어가기도 비좁다. 원래 마을 안에 있던 생가이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 들어가는 입구의 불필요한(?) 벽돌담만이라도 헐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유관순 열사의 경우 생가가 따로 있는 데다가 기념관이 별도로 있지만 박차정 의사의 경우는 생가를 겸한 전시 공간이라 더욱 초라해 보인다.
"박차정 의사 동상을 보십시오. 박 의사는 총을 들고 있습니다. 무기를 들고 활약한 분들은 의사(義士)십니다.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처럼 말이지요. 박차정 의사는 여자지만 당당한 의사입니다. 유관순 같이 무기를 들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열사(烈士)지요. 저는 알기 쉽게 여기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주말이면 많은 학생들이 찾아옵니다."
주용돈 해설사의 말이다. 그는 올해 1년 동안 박차정 의사 생가에서 해설사로 일한다고 했다. 15살이던 박차정 의사는 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했다. 이후 근우회,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29년 3월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7월 서울 수운회관에서 열린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는 등 서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