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와 나란히 문을 연 김일성종합대학‘김대’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김일성종합대학은 1946년 10월 1일 개교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북한 인민이 모은 성금과 쌀, 노동력 제공으로 건립된 걸로 알려져 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다수 농민이 자녀를 교육시킬 대학 건립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김일성종합대학 건립 당시 농민이 모은 성금과 쌀은 1억 원에 달한 걸로 알려졌다. 김일성종합대학은 개교를 앞두고 남한과 소련, 만주에서 저명한 학자를 광범위하게 초빙했고, 파격적인 대우로 당시 탁월한 업적을 지닌 교수를 상당수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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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사흘 빠른 1946년 9월 15일 평양에서 김두봉을 초대 총장으로 '김일성종합대학' 개교식이 있었다. 10월 1일 개교를 앞두고 김일성을 포함한 정당 대표가 참석한 개교식을 먼저 거행했다. 북한은 1946년 5월 25일 창립준비위원회를 만들고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공식 결정에 따라 종합대학 창설을 준비했는데, 미군정의 국립 서울대학교 추진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남과 북이 경쟁하듯 국립대학 설립을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이학부, 문학부, 법학부, 공학부, 농학부, 의학부, 운수공학부 등 7개 학부, 60여 명의 교수, 1500여 명의 학생으로 문을 열었다(지금은 15개 학부, 60여 개 학과가 있다).
1947년 3월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이 문을 여는데, 서적 기증 운동을 통해 6만 3천여 권의 장서를 마련했다고 한다. 평양공업대학(현 김책공업대학), 사리원농업대학(현 원산농업대학), 평양사범대학(현 김형직사범대학)이 차례로 문을 열어 1949년 9월에는 15개 대학이 개교했고 1만 8천여 명의 학생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교육 분야에서 '현상 유지' 정책을 펴던 미군정은 북한 지역에서 소비에트화가 진행되자 남한에서 정책을 전환한다. 초등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의 6-3-3-4 학제가 도입된 것도 1946년 9월 1일부터다. 이 과정에서 중도 또는 좌파 성향의 교육 전문가가 교육 정책 수립 과정에서 배제된다. 남한에서 '반공'을 틀로 하는 미국 교육이론이 횡행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국립대학 제도가 없는 미국이 남한 지역에서 국립 서울대학교를 출범시킨 것은 왜일까. 명목상으로는 통합을 통해 건물과 시설, 인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경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군정 학무국 부국장으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안을 주도한 오천석은 미국 주립대학을 모델로 국립종합대학을 구상하면서 관공립 고등교육기관에 재직하던 좌익 및 반대 성향 교수를 배제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은 교수 축출 및 교수 재임용 제도의 나쁜 선례로도 기능했다.
서울대학교 설립으로 귀착되고 말았지만 해방된 나라, 새로운 공화국 시대에 맞는 국립대학교는 왕조 시대 성균관의 부활도, 일제가 만든 경성제국대학의 존속도 아닌 '제3의 길'이 아니었을까.
대학도서관의 '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