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우리는 성냥불을 밝히면서 그 찰나의 불빛을 통해 인류와 문명의 진화라는 그 원초적 기억을 반짝 환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호철
제우스 몰래 '천상의 보물'이었던 '불'과 '지혜'를 훔쳐서 인간에게 전해준 것은 프로메테우스였다. 진노한 신은 그를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고,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내렸지만, 인간은 그 보물에 기대어 오늘날의 문명을 창조했다.
프로메테우스가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불이 인류 문명의 발전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했는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다. 불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에너지양의 지속적인 증가와 인간이 불을 제어하는 것이라는 현대 과학기술사'의 특징은 그만두고서라도 불이 없는 인간의 일상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 난만한 21세기에도 인간은 불 없이 음식을 익히고 어둠을 밝히거나 공간을 덥힐 수 없다. 불은 현대기술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불꽃의 모습이라는 본질적 형태는 잃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불을 얻었지만, 현대인은 지금도 휴대할 수 있는 몇몇 발화(發火) 도구의 도움을 받아 간단히 불을 만들어낸다.
성냥이 보여준 '신세계'
불을 일으켜 붙이는 도구로서 성냥과 라이터가 그거다. 라이터만 해도 꽤 진전된 기술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지만, 성냥은 의장(意匠)과 형태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마찰로 불을 일으키는 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성냥'은 산부인과 계통의 의서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1608년)에 나온 옛말 '석류황(石硫黃)'에서 유래했다. "유황(硫黃)을 돌[石]처럼 굳혀 불을 붙이는 도구"라는 뜻의 '석류황'이 음운 변화 단계를 거쳐 오늘날의 '성냥'이 된 것이다.
성냥은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승려 이동인이 들여왔다. 부싯돌보다 사용하기 편해서 큰 관심을 모았으나 성냥의 대중화는 강제합병(1910) 이후부터다. 당시의 '대중화'가 어느 수준을 이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싯돌로 불을 붙여온 이들에게는 성냥이 보여준 실용성은 '신세계'였을 것이다.
마찰로 불을 일으키는 원리야 다를 게 없었지만, 성냥개비를 두어 번 갑(匣)의 마찰 면에 그으면 매캐한 화약 냄새를 풍기며 불이 붙는 그 신식 물건이 주는 감동은 남달랐을 것은 분명하다. 성냥불 켜기는 여러 차례 부싯돌을 긋고 부싯깃에 불이 붙어 연기가 나면 입바람을 불어서 불씨를 살리는 기존의 불붙이기에 비기면 꽤 혁명적인 방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어른들은 성냥을 '다황'이라고 불렀다. 그게 '당황(唐黃)', 예전에 성냥을 이르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이다. '당'은 당나라, 즉 중국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당나귀'나 '당나발', '당면(唐麪)' 등에서와 마찬가지 뜻으로 쓰였다. 쉽게 발음하려다 보니 '당'에서 이응이 떨어졌다. '황'은 유황[磺]의 뜻으로 쓰였으니 '당황'은 "당(중국)에서 들어온 유황"이라는 의미인 셈이다.
1960년대만 해도 성냥은 그리 흔한 물건은 아니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조리하고 군불을 넣으며, 방마다 호롱불을 밝히던 시절이다. 손바닥만 한 성냥갑은 이방 저방으로 옮겨가며 불을 밝혀야 했고, 습기를 막고 찾는 수고를 덜고자 공중에 고무줄로 매달려 있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졸업으로 학력을 마감한 동무들은 남 먼저 배운 담배를 피우려고 나무하러 갈 때 호주머니에 성냥개비 몇 개와 성냥갑에서 떼어낸 적린(赤燐)이 칠해진 마찰 면 일부를 챙기곤 했다. 나무꾼들만이 아니라 성냥을 휴대할 필요가 있을 땐 누구나 그런 방식을 썼다. 휴대용 작은 성냥갑이 일반화된 건 1970년대나 되어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