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2일 청와대 앞에서 '위험의 외주화 금지 약속 파기 산업안전보건법 하위법령 규탄 기자회견'이 열렸다
민주노총
국회를 통과한 법 조항 자체가 고용노동부의 작업 중지 명령 범위를 좁혀놨으니 일부는 '개악'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도 혹시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을 통해 법 규정의 이런 문제를 보완할 방안이 있을까? 지금 정부가 제시하고 시행령과 시행규칙 예고안에는 작업중지해제심의위원회와 관련된 내용 외에는 작업 중지와 관련된 세밀한 규정이 없다. 이태진 부장은 중대 재해 발생 외에도 고용노동부가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조건을 시행규칙 수준에서 규정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안전보건 조치가 안 되어 있어 법 위반이 확인된 공정에 대해서는 노동부가 작업 중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수준을 담아야 한다. 일선 현장에서 회사는 평소에 규칙을 하나도 안 지키고 있다가 사고가 나면 '재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사고가 안 나던 곳이다' '사고 노동자가 잘못했다'고 한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상황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런 생각을 뒤집어야 한다. 안전보건 조치가 안 돼 있으면 작업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게 여겨져야 한다.
작업 중지를 하고 현장 점검을 하는 것도 결국은 법 위반 사항을 찾고 그걸 개선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 보건 조치 위반 사항이 있는 경우 고용노동부가 작업을 중지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필요하다. 고용노동부 내부에는 위험 상황 신고 처리지침이 있다. 그 안에는 사용 중지,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기준도 있다. 이걸 시행규칙 수준으로 상향시키면 고용노동부 작업 중지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현실은 위험 상황 신고를 받고 감독관이 나간 경우에도 작업 중지 대신 개선조치 할 것을 먼저 요청한다. 그 후 조치가 안 됐을 때 작업 중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해당 작업자들은 개선조치가 될 때까지 중대 재해를 발생시켰던 위험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작업 중지가 더 적극적으로 사용돼야 하는 이유다."
개선이 있어야 작업 재개가 있다
노동부 지침으로 존재하던 작업중지해제심의위원회는 시행규칙에서 규정되는 것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시행규칙 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빈틈이 많다는 것이 이태진 부장의 우려다.
"이전의 노동부 내부 지침에도 사업주의 작업 중지 해제 요청이 들어오면 4일 이내에 작업중지해제심의위원회를 개최하여 해제 여부를 결정하게 돼 있었다. 해제신청서 제출 전에 개선 내용에 대해 관련 작업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는 돼 있지만, 정확히 어떤 개선 조치가 얼마나 수행되어야 하는지는 규정이 없다.
지부 내 한 지회에서도 중대 재해로 인한 작업 중지 사례가 있었다. 회사가 작업 중지 해제를 요청하고 심의위원회가 열리자마자 작업 중지가 해제됐다. 아직 개선이 없는 상태다. 당시 회사는 600억 원을 들여 개선하겠다는 '계획'만 가지고도 작업 중지 해제를 받을 수 있었다. 심의위원이 누구인지도 비공개이고 회의록도 공개가 안 되니 이런 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는지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사고를 예방하려는 조치가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확인이 있고 난 뒤에야 작업이 재개돼야 한다. 이를 담보하기 위해 시행규칙에 안전·보건 조치 사항을 개선한 뒤 작업중지해제신청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어 해제심의위원회에 노동조합이 추천하는 전문가가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해야 한다. 또 해제심의위원회가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도록 위원 구성과 회의록 등이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말했던 바가 있는 만큼 이제는 사업주가 해제신청서를 제출할 때, 미리 작업노동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시행규칙에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도 규정이 조금 더 자세해질 필요가 있다.
"노동부의 작업 중지 명령이 내려져도 작업 중 무엇이 문제가 돼서 그런 것인지 현장 노동자는 모를 수 있다. 어떠한 설명 없이 현장에 '작업 중지를 명한다'는 스티커만 붙는다. 작업 중지 이유는 노동부가 회사에 알릴 뿐이다. 개선 이후 확인도 마찬가지다. 회사가 이래저래 개선했다 혹은 개선하겠다는 얘기를 노동부에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의견이라며 관리자 한 명 앞세우는 것은 회사로서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래서 작업자 '과반수의 의견 청취'를 진행한 후 해제 신청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다시 해제심의위가 직접 인터뷰 등을 통해 신중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왜 중지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인데 단순히 노동자 의견을 듣는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작업 중지 길게 하면 회사가 망한다'는 말은 현장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회사가 불안을 조장해 '공장이 빨리 가동돼야 한다'는 생각을 노동자들에게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노동자들에게 작업 중지와 관련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사고 후 작업 중지로 일을 못 하는 동안 급여가 100% 보전되도록 해 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실제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도록 시행규칙 등에 담아야 한다.
정부가 최근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대 재해 발생 후 트라우마에 대한 대처 등도 규정할만한데 전혀 담기지 않았다. 지금은 '사고 목격 후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질환도 산재'라는 측면에서만 접근되는데, 질병에 걸리는 것을 줄이기 위해 중대 재해 발생 후 시행돼야 하는 안전보건 조치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이 1990년 이후 30여 년 만에 크게 개정된 것은 전적으로 태안화력 비정규노동자 김용균씨의 사망 이후 벌어진 투쟁 때문이었다. 투쟁의 성과인 법 개정인데도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협소하게 규정되면서 법 개정의 취지마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수백 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행정 규칙에 대한 문제를 현장에서 제기하고 토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에 쏠렸던 관심이나 투쟁 열기도 줄어들고 있다. 이태진 부장은 법 개정 내용에 대한 교육이나 강연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이라도 확장된 권리를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시도하는 투쟁을 기획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봤다.
"교육에서는 작업 중지에 대해 '우리가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가 명백하게 생겼다. 내가 판단하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권리를 노동자들이 실제로 내 것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도록 하는 노력이다. 노동자들이 이런 요구를 했을 때 현장에서 제대로 진행되는 경험을 만드는 것이다.
싸움이 있어야 제도도 바뀌는 것 같다. 이번에도 김용균 투쟁을 통해 우리가 의도한 만큼은 아니지만 일부 제도 개선을 이룬 것 아닌가. 권리를 확장하는 싸움이나 시도가 계속 기획될 필요가 있다. 충청권에서는 노동자가 위험상황 신고전화를 하면 24시간 어느 때라도 노동부가 곧바로 전화 받고 대응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이 위험상황 신고전화나 위험할 때 작업 중지의 경험을 하게 되고 인식이 바뀌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제도 개선 과정에서는 회사나 자본도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선다. 벌써 경총 등은 '사고 난다고 무조건 작업 중지하는 것은 국민의 자유권 침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태진 부장은 제도 개선 국면에서 노동자와 노동조합도 좀 더 비상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시행규칙에 대한 의견은 6월 3일까지 고용노동부에 제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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