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애쓰는 원장현 대금 연주자
금현국악원
(*
원장현 대금 연주가 인터뷰① 편에서 이어집니다.)
그는 활발한 공연활동과 음반 발매를 통해 대금의 대중화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93년부터는 '원장현과 아시아음악'이라는 타이틀 아래, 인도·베트남·중국·일본·몽골 등 아시아 각국의 전통 음악인들을 초청한 공연을 선보이면서 서로의 음악이 활발하게 교류될 수 있는 다리를 놓았다. 처음 음악회를 시작하게 된 것도, 10회 차나 되는 공연을 끌고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음악의 힘 덕분이었다.
"1992년에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하는 것을 본 재일교포 분이 적극적으로 후원을 자처하면서 시작하게 됐죠. 그분이 그 공연에서 '젓대소리 한' 음악을 듣고 아버지의 설움을 절절하게 느꼈다 하더라고요. 그분 아버지께서 일제 강점기 때 강제 징용돼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돌아가셨는데, 음악을 듣고 비로소 맺힌 한(恨)의 응어리가 풀린 거죠.
그런 인연으로 공연을 쭉 이어가며 받은 인상은, 타 아시아 국가에서는 예술가들에 대한 대우가 남다르고, 전통음악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것이었어요. 문화라는 건 10년 뒤지면, 그걸 한 번에 회복할 수가 없잖아요. 절대 경제논리에 맞춰서 문화정책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계기죠."
대금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전하다
그는 전통음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더 널리 알리기 위해 대금과 함께 전 세계를 넘나들면서 관객들에게 감동의 무대를 선사했다.
"외국에서 우리 전통문화가 얼마나 각광받는지 몰라요. 국내에서는 10분만 들어도 지루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시나위(무속음악에 뿌리를 둔 즉흥 기악합주곡 양식의 음악)를 30~40분 요구하는 건 기본이고요. 정말로 음악에 관심 있는 소수의 관객이 오기 때문에 몰입감이나, 집중도가 대단해요. 그런 관객 태도를 보면서 관객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바라보게 됐어요. 한 명이라도 제 음악을 진정으로 듣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연주 못해줄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가 1985년 북촌에 '금현국악원(琴絃國樂院)'을 연 것도 이 때문이다. 대금 소리를 좋아하는 이들과 국악 강습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언제든 이곳을 사랑방처럼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층 건물에 개인 연습실 및 연구실, 단체 연습실을 개방해 전통국악의 문턱을 낮췄다.
"예전 은사님들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따스한 가르침을 베풀어주신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열렬히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수업료가 없어 공부를 못 했다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돈이 없더라도 배울 수 있고, 하루 종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연습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겠다 싶었어요. 또 약속한 수업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고, 공간을 활짝 개방했죠.
훌륭한 선생님들에게 제대로 배워서 그래도 나름대로 한 시대를 예술로 풍미했고,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으면서 살아왔는데 후학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떠나야만 원이 없겠더라고요. 죽어서 이름 석 자 빛나지는 못할지언정, 흠결은 남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는 후학 양성이야말로, 죽기 전까지 전심전력을 다해 기울여야 할 평생의 과제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후학에게 진실되고 올바른 교육을 하는 게 중요해요. 왜냐, 우리한테 배운 것을 그대로 후대에 전달할 것이 아닙니까? 내가 제자한테 가진 것을 100% 쏟아 붓는다고 해도 개개인의 재능이나 노력, 그리고 예상치 못한 외부상황 같은 변수가 존재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원형 그대로가 후대를 거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할 위험요소도 존재한다는 거예요.
다행히도 요즘은 음원과 악보가 있고, 경제적 여건이나 교육법들이 더 진일보했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조금만 더 신경을 쓴다면, 판소리와 산조는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후학 양성은 사명감과 의무로 해야지, 어떠한 핑계가 붙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야 우리 전통이 찬란하게 뿌리를 내리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