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세대 전승.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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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연구의 길을 연 미국의 역사가 힐베르크(Raul Hilberg)는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의 증언들을 재구성한다고 해서 국가범죄의 전모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미군이 노획한 방대한 양의 나치문서 분석에 10년의 세월을 바친 그의 역저 <유럽 유대인의 파괴>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살인의 메커니즘을 한눈에 알 수 있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경우가 다르다. 이미 많은 기록이 파기되었고, 핵심 가해자의 증언도 찾아보기 어렵다. 가해시설도 마찬가지다. 남영동 구 대공분실이 국민적 관심사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이곳에 끌려와 극한의 테러를 경험한 사람이 393명이다. 민주와 통일을 염원했다는 이유로 각처의 대공시설에서 기본권을 유린당한 분들의 수는 아직도 정확하게 가늠되지 않는다.
주변 지형 활용한 민족-민주-인권-평화 클러스터 구축해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망각의 관행이나 선택적 기억의 편향과 단절하기 위해서도 남영동 구 대공분실의 복원과 보존은 절실한 사안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작년 6․10민주항쟁 기념사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을 의식하며 민주인권기념관을 남영동에 조성하겠다고 화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의 문제다. 국가범죄의 현장을 국민기억의 컨테이너로 바꿀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토포그래피(topography)에 주목해야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하나의 독립된 공간이 아니라, 이 일대의 역사 지형 속에서 조망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도보 1.7㎞ 거리에 백범기념관과 효창공원이 있고, 900m 떨어진 청파동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있다.
서울시의 계획대로라면, 효창공원은 2024년까지 독립운동 기념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남영동 배후의 이 지대를 묶는 키워드는 민족이다. 또 바로 앞 한강대로 건너편에는 전쟁기념관과 용산 미군기지가 있다. 미8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가 있는 미군기지는 2023년에 우리 국민에게 반환될 예정이다. 전쟁기념관을 평화박물관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곧 반환될 80만 평의 본체 부지는 특별법에 따라 이미 생태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거대한 생태의 구릉에 평화와 통일의 색을 입히자는 제안도 있다.
이 계획과 구상들을 하나로 잇는다면, 서울의 허파지대가 확 바뀌게 된다. 민족-민주-인권-생태-평화의 메가 클러스터가 탄생하는 것이다. 효창동-청파동-남영동-용산공원-남산-장충단을 잇는 이 역사-평화의 가로축이 북악산-종묘-남산-용산공원-한강-동작동 현충원으로 이어지는 생태-역사의 세로축과 만나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이 거대한 십자 축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와 인권의 기억 창출로 제 기능을 다할 것이다.
세상에 없던 기념관을 만들자
다음으로 우리나라 기념관을 옥죄어왔던 '선례의 덫'에서 탈출해야 한다. 토목과 건축에는 막대한 돈을 할애하면서도 연간 예산 배분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정부와 예산당국, 경상비 위주 관행에 따른 사업비와 학예 인력의 태부족, 패널과 쇼윈도 중심의 교과서적 전시가 덫의 주요 내용이다.
특징없는 기념관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해외의 성공사례들을 주목할 선례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덫'으로부터의 탈출이 기념관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세상에 없던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좀 더 과감한 사고가 필요하다. 몇 가지만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