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공연 후 다같이 선 '몌별 해어화' 참가자들
CPN문화유산
우리시대 마지막 예기 '권명화' 생의 마지막 무대에 오르다
봄의 끝에서 춤의 노름마치들과 뜻 깊은 공연을 선사하다
20일 오후 4시,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에서 '몌별 해어화' 공연이 개최되었다. '해어화'의 뜻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의미로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두고 한 말이었다가 기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번 공연은 지난 2013년 9월 12일에 개최된 '해어화' 공연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2013 '해어화'는 우리시대 마지막 예기 3인인 군산 장금도, 동래 유금선, 대구 권명화 명인의 무대로 당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그 후 6년이 지난 현재, 장금도 명인과 유금선 명인은 소천하였고, 마지막 기예로 남은 권명화 명인을 비롯해 그들을 기리는 춤의 노름마치들이 함께 추모 무대를 꾸몄다. 특히 권명화 명인은 사실상 이번 공연이 생의 마지막 공연이라고 이야기한 만큼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장금도 명인과 유금선 명인>
故 장금도 명인은 1928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12살에 소화권번에 입적한 이래로 '판소리', '승무', '검무', '화무', '포구락', '살풀이춤' 등을 익혔다. 16살의 나이에 군산 명월관에서 일급 허가증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를 피해 시집을 갔지만, 해방된 후 다시 판에 나왔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아들이 자신의 직업 때문에 주먹다툼을 하자 그 후로는 한동안 판을 나가지 않았다.
1983년, 1998년 두 차례 명무 공연만 나왔을 뿐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다가 2002년 다시 무대에 선다. 그 후 2005년 '전무후무' 공연에서는 50년 만에 아들과 화해를 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아들은 3년 뒤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아들을 위한 살풀이춤을 춘 이후 요양을 하다가 2013년 '해어화' 공연을 마지막으로 올해 소천했다.
故 유금선 명인은 1931년, 동래에서 태어났다. 14살에 동래권번에 입적했으며, 박기채, 채장술 등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배웠다. 17살에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김강남월, 원옥화, 김계월과 함께 '날리는 사인방'으로 불릴 만큼 유명해졌다.
그러다 꿈같은 사랑으로 판을 떠났지만 남편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다시 무대에 서고 '구음'이라는 최고의 반주음악을 선사한다. 93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3호 동래학춤 구음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동래학춤 공연에는 늘 함께했다. 2013년 '해어화' 공연을 마지막으로 이듬해 소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