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자리로 향하는 한일 외교장관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일 오전(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호텔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양자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라는 일본의 노림수는 한국 정부의 외교력을 시험대에 올려 놓았다. 이 역시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임이 분명하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이후, 한국정부의 외교적 자의식이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남북미 관계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당사자 역할을 하라'는 북한의 쓴소리도 있었고, 보수진영에서는 '중재자 역할을 자임해서 여기저기로부터 패싱당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외교를 잘하고 있다. 아니, 역대 어느 대통령도 하지 않았던 외교를 하고 있다.
이번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강경화 장관의 모습 역시 한국의 외교적 전환을 시사한다. 고노 외무상을 대하는 강경화 장관의 모습, 전체 회의에서의 발언, 강경하지만 절제된 태도는 지금 한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입장을 잘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고노 외무상은 어이없는 실수를 범했다. 강경화 장관의 발언에 대응한답시고 "한국이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되어 아세안 국가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는데 뭐가 문제냐, 다른 아세안 국가들은 다 가만히 있지 않느냐"고 말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 말은 되돌릴 수 없는 외교참사다.
이 외교참사는 역으로 다른 기회를 만들었다. 그에 해당하는 발언은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무장관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아세안이 일본이 규정하는 화이트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날 처음 알았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뺄 것이 아니라 아세안 국가를 화이트 국가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나 적확하고 품격 있는 발언이었다. 다자간 협력관계에서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정확히 짚어내면서도 일본 정부에 대한 분명하고 강력한 메세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일본과 대등하게 힘겨루기를 해야할 이유는 충분하게 차고 넘친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에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이 담고 있는 '승패구도'는 일본을 압박하고 국내 여론을 결집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아쉽다. 지금 한국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양자대결이 아니다. 남한과 일본, 북한과 미국,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아세안 국가들 모두가 이 상황의 이해관계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발언은 의도적으로 양자대결을 넘어선 다자외교의 언어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국 전 민정수석이 즐겨 사용했고 이제는 대부분의 언론이 사용하고 있는 '경제 전쟁'이라는 표현은 한편으로 이율배반적이다. 한반도의 종전선언을 가져오고자 하는 지금 시점에서 한국 정부에게는 '전쟁의 은유'를 넘어서는 상상력과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갈 실행력이 필요하다. 그 상상력과 실행력에 대한 힌트는 앞서 언급한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무장관이 취했던 태도에서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