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도서관
한국관광공사
제일 처음 내 글이 지면에 실린 건 중도일보 신춘에세이에 선정되면서였다. 문학입문생의 꿈을 꾸고자 처음 발을 디딘 곳은 한남대학교 평생교육원이었다. 1995년 등단하고, 상업학교 출신인 내가 다시 늦은 학업을 시작한, 그러니까 학사고시를 준비한 곳도 유성도서관이었다. 한밭도서관과 유성도서관 밥을 엄청 먹었다. 두 아이도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였다. 겨우 학사를 마치고 대학원을 마친 후 초보 강사로 선생 노릇도 시작한 곳도 대전에서였다. 태어나 성장한 곳도 아니면서 나는 뭐든지 대전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 모든 길목에서 동무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 동무들은 모두 백년지기가 되었다.
막 들어선 신시가지 둔산동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한 후에 대전에 집필실을 마련했다. 막 개발한 노은동 원룸이 첫 집필실이었다. 나중엔 임대아파트에서 집필실을 얻어 한동안 지내기도 했다. 평생 동지를 만들어준 시모임 '평상' 동인들이 함께해주었다. 시편들과 마주앉아 얼마나 다투었던가. 노은동 원룸에서 함순례 시인과 단둘이 라면 끓여먹으며 <평상> 모임을 지킨 적이 있는데, 그때 웃으며 '먼 훗날 이 시간을 이야기하게 될' 거라며 서로 위로했는데, 이 글이 그날이 된 셈이다. 선후배들은 만들어준 대전작가회의는 정말 그리운 우물이다. 문학에 동지들은 얼마나 중요한지, 혼자 하는 것인 줄 알지만 문학은 결코 혼자 가는 길이 아님을 알게 해준 동무들이다.
또 '천지간'이라는 모임을 가졌는데, 내겐 참 융숭한 여울이었다. 서예, 디자이너, 음악, 문학, 서예, 회화, 영문학, 역사 등의 한 분야에서 20년 이상 종사한 전문인들이 교류하는 자리였다. 한 분야에서 20년이 지나면 고집이 생기기 쉬우니, 제 분야를 고집하기보다 새롭고 유연한 가치를 배워 자기를 확장하려는 모임이었다. 가볍고 흥미로웠고 진지했다. 다양한 분야가 어떻게 연대하고 어떤 문제를 공유할 것인가를 나누는 자유로운 모임이었다. 이러한 15~16명으로 구성된 만남 또한 대전을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대전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대전에서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전 시내 골목골목을 누볐다. 덕분에 대전의 길과 역사를 세세히 알게 되었고,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대전의 숨은 풍경을 이해했다. 대청댐을 비롯, 공주, 논산, 청주 등 주변의 자연도 샅샅이 돌아다닌 편이다.
대전 시내에서 어느 방향으로든지 20~30분을 달리면 푸르게 다가오는 자연들. 조금난 외곽으로 나서면 논산, 공주, 청주 등의 소도시들과 마주칠 수 있는 것도 대전의 매력이 아닌가. 대전 인근으로 돌아다니면서 마주친 그 무수한 존재들. 모든 사물과 풍경과 상황들이 얼마나 언어를 가지고 있는지 확연히 배운 시간들이었다. 대전에서 사진을 시작하면서 나의 문학적 시선이 깊어진 셈이다. 그 새로운 응시들이 문학의 수레바퀴살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내 주치의도 대전에 있다. 내가 알레르기 천식 때문에 고생하고, 어떤 부분이 약해 자주 앓는지 잘 알고 있는 의사. 오류동 이동복 소아과의 선생님은 지금도 때마다 건강을 묻고 약을 챙겨준다. 안부도 없이 지내다가 감기가 들거나 아프면 전화를 드는, 아주 뻔뻔한 나에게 보여주는 한결같은 우정은 그 자체로 치유이다.
그런데 나는 배신자였다. 대전을 떠나버린 것이다. 나를 지지하고 키워준 대전을 훌쩍 떠나왔다. 부산으로 귀환해 원도심에서 <백년어서원>을 운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인문학 카페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환호하던 동무들은, 장소가 '부산'이라는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했다. 참 서운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속없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부산에 달려와 부산에 <백년어서원>을 열 수 있도록 도움을 펼쳤다. 20년만의 귀향이었기에 부산에는 친구들이 거의 없는 무렵이었다. <백년어>에 있는 백 마리 나무 물고기도 대전에서 출발했다. 충청도 연산 산골에 있던 옛집을 헐면서 땔감이 된 나무들을 대전 서예가 석정 선생이 아궁이 앞에서 일일이 깎고 이름을 새겨주었다.
하다못해 지금 쓰고 있는 에어컨도 대전이 마련해 준 것이다. 조각가 최영옥 작가는 화장실을 표시하는 작품을 하나 부탁했더니 멋있는 표지판을 만들어주어 아직도 사람들은 재미있어 한다. 도운 손길을 어떻게 일일이 거론할 수 있을 것인가.
인문공동체로 장소성과 공공성을 확보하고 있는 <백년어서원>은 대전 동무들의 소소한 손길로 완성되었다. 가난한 시인의 빈손을 염려한 대전 동무들의 몸과 마음의 도움을 받아 <백년어서원>은 문을 열었다. 아직도 많은 격려를 받고 있는 중이다. 결국 <백년어서원>은 아직도 대전의 냄새로 그득하다. 그렇게 나는 대전에 빚을 졌다. 선물 같은 빚이다. 그 빚는 늘 그리움을 만든다. 대전을 빚을 진 느낌만으로도 나는 넉넉해진다. 언제든 달려갈 이유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신기할 정도로 대전은 나를 받아주고 성장시켜 주었다. 의리 깊은 친구들이 대전에 있다. 이 발언만으로 나는 행복해진다.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고, 나들 동무로 받아준 대전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운 냄새를 가지고 있다. '한밭'이라는 그 자체의 너그러움은 포구의 상상력을 준다. 대전은 내가 문학이라는 바다로 나가는 아름다운 포구였다. 아직도 '대전'하면 먼 수평선과 새푸른 파도소리들이 환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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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부산 출생, 시인.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를 졸업 했다. 시집『길의길』,『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붉은 사하라』『젯밥과 화분』『몰락경전』사진에세이집『하늘이 보이는 쪽창』,『지붕 밑 푸른 바다』,『당신은 나의 기적입니다』산문집『씨앗을 지키는 새』『백년어』『유쾌한 달팽이』『참죽나무 서랍』『쿠바, 춤추는 악어』『스미다』『나를 지켜준 편지』가 있다.
2005년 부산작가상 수상, 최계락문학상 수상.
부산 원도심서 글쓰기 공동체 <백년어서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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