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본래 정신인 '홍익인세'로 돌아가야"

충북 옥천에서 열린 38번째 단군제... "삼신의 중심은 사람"

등록 2019.09.30 09:54수정 2019.09.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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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기 4352년 단군제가 제천철을 5일 앞둔 28일 오후 6시 옥천 가산사(충북 옥천군 안내면) 뒤 영고단에서 열리고 있다. 수 백여명의 참석자들이 다음날 아침까지 밤을 지새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
단기 4352년 단군제가 제천철을 5일 앞둔 28일 오후 6시 옥천 가산사(충북 옥천군 안내면) 뒤 영고단에서 열리고 있다. 수 백여명의 참석자들이 다음날 아침까지 밤을 지새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심규상
  
 행사장인 옥천 가산사(충북 옥천군 안내면) 뒤 영고단 주변에 제 1세에서 48세까지  단군성조의 이름을 새긴 천이 새겨 둘러져 있다.
행사장인 옥천 가산사(충북 옥천군 안내면) 뒤 영고단 주변에 제 1세에서 48세까지 단군성조의 이름을 새긴 천이 새겨 둘러져 있다.심규상
 
전날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산속 당산나무 아래에서 밤새워 마시고 먹고 가무를 즐기는 축제가 있다. 매년 옥천 가산사(충북 옥천군 안내면) 뒤 영고단에서 열리는 단군제다.

올해 단기 4352년 단군제는 제천철을 5일 앞둔 28일 오후 6시 시작됐다. 38번째다. 단군제는 가산사 지승 스님이 정방사(충북 제원군 금수산)에서 영고제를 지낸 게 시작이다. 영고제는 옛 부여 때부터 수확과 추수에 대한 감사로 올리는 제례다. 지승스님이 이곳 가산사 주지를 맡으면서 단군의 품 자락에 모여 술과 풍류와 더불어 하나가 되자며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지난 2000년) 매년 제례를 주관하고 있다.


'국조단군왕건신위'

당산나무 아래 영고단 제단에 단군 왕건의 신위를 모셨다. 나무 둘레에는 제1세에서 48세까지 단군성조의 이름을 천에 새겨 둘렀다. 나뭇가지에는 원색의 천을 감아 사방으로 내렸다. 나무 아래 천제단에는 참석자들이 정성 들여 장만한 음식을 차렸다. 맨 앞줄에는 마늘과 쑥을 놓았다.

제주 지승 스님이 네 번 절하는 것을 시작으로 단군제가 시작됐다. 이어 고천문을 낭독했다. 매년 단군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고천문 내용에 주목하고 있다. 지승 스님은 고천문에 현안에 대한 판단과 대처방안을 설파하고 있다. 이날 고천문에서 지승 스님은 "이 나라의 보수는 친일과 친미를 고수하는 한낱 수구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이 나라 보수는 한낱 수구에 불과"

"당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삼국통일을 하면서 비굴한 모화주의가 움텄습니다. 거기서 삼국사기 같은 망국의 역사 서책이 나오고 양반 중심의 성리학 정치를 시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이승만이 친일파와 친미파를 감싸면서 보수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 지상 천국이나 지상 낙원을 이룩 할 수 없어 조금씩 노력해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 진정한 보수 정신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나라의 보수는 친일과 친미를 고수하는 한낱 수구에 불과합니다"
 
 옥천 가산사(충북 옥천군 안내면) 뒤 영고단에서 지난 28일 오후 6시 단기 4352년 단군제가 열리고 있다. 참석자들은 다음 날인 30일 아침까지 산속 당산나무 아래에서 밤새워 마시고 먹고 가무를 즐겼다.
옥천 가산사(충북 옥천군 안내면) 뒤 영고단에서 지난 28일 오후 6시 단기 4352년 단군제가 열리고 있다. 참석자들은 다음 날인 30일 아침까지 산속 당산나무 아래에서 밤새워 마시고 먹고 가무를 즐겼다.심규상
 
 
 지승 스님이 참석자들에게 쑥과 마늘을 나눠 주고 있다.
지승 스님이 참석자들에게 쑥과 마늘을 나눠 주고 있다.심규상
 
제례가 끝나자 지승 스님이 참석자들에게 쑥과 마늘을 고르게 나눴다. 100일 동안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만을 먹고 여자의 몸이 된 웅녀(熊女)가 환웅을 만난 단군의 출생과 건국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의식이다. 참석자들은 단군제를 종교와 종파를 떠나 무교(無敎)를 실현하는 자리라고 말한다. 단군을 생각하든, 단군을 핑계 삼든 개의치 않고 만나 홍익인세(사람 중심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는 세상) 취지를 공감하면 족하단다.


제사 의식이 끝나자마자 노래하고 춤추며 어우러지는 음주·가무가 시작됐다. 곳곳에 막걸리를 가득 담은 항아리와 놓여 있다. 갖가지 음식과 술안주까지 풍성하다. 모두 참석자들이 헌금과 자원봉사자로 마련했다.

신을 부르는 의식, 태극검 시연, 피리독주, 북품, 판소리, 가야금병창, 민요한마당, 참석자들의 장기자랑 등 가무가 틈 없이 이어졌다. 모두 대가 없이 무보수로 재주와 능력을 선보였다. 스님들이 선보인 무술 시연은 분위기에 의미를 더했다. 행사 장소가 임진왜란 때 3천여 명의 승병과 의병을 훈련하는 군영으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승병과 의병은 금산 연평곤 전투에서 전원 순국했다. 숙종은 가산사에 승병장 영규대사와 의병장 조헌의 영정각을 짓고 제향을 받들게 했다. 가산사에 영규대사와 조헌을 기리는 영정각이 있는 연유다. 정부는 단군제가 열리는 행사장에 순국충혼탑 건립을 추진 중이다.


자정께 상여 놀이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상여 틀에는 참석자들이 쓴 소망 쪽지가 틈 없이 달렸다. 홍익인세, 검찰 개혁, 평화통일 글귀도 눈에 띈다. 참석자들이 상여꾼의 소리에 맞춰 상여를 매고 행사장을 오래도록 오갔다. 흥에 겨워 노는 사이 이미 목이 잠긴 사람도 많았다.
 
 38번 째 단군제를 주관한 지승 가산사 주지스님. 왼쪽 아래  '영고제단' 표지석이 보인다.
38번 째 단군제를 주관한 지승 가산사 주지스님. 왼쪽 아래 '영고제단' 표지석이 보인다.심규상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는 사이 동이 터 올랐다. 해 오름 굿이 시작됐다. 밤을 새운 사람들이 내년 있을 39번째(단기 4353) 단군제를 기약하며 하나둘 자리를 떴다. 하지만 올해가 마지막 단군제일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지승 스님은 이날 낭독한 고천문에서 "제단에 순국충혼탑이 들어서면 영고제를 기약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순국충혼탑 때문이 아닌  하늘에 막연한 심정으로 삼신을 부를 수만은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언제까지 제단에 매달려서 복을 빌기만 할 게 아니라 이제부터는 사람이 할 짓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라고도 했다. 제를 지내 삼신과 천지신명을 부를 게 아니라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삶의 현장에서 실천을 강조한 말로 보인다.

지승 스님은 "삼신의 중심은 하늘이나 땅이 아닌 사람"이라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천제단에서 미래의 인류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걸 거듭 확인한다. 민족의 본래 정신인 홍익인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승스님은 속리산으로 출가해 스님이 된 뒤 조선 상고사에 관심을 두고 만주로 관련 자료를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 연변대학 조선문제연구소에서 일하다 가산사 주지를 맡았다. 저서로는 <피야피야 삼신 피야>,<한밝나라 이야기>, <삼신과 동양사상>,<법치국가의 민초들이 운다>, <우리 상고사 기행> 등이 있다.
#단군제 #가산사 #지승스님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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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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