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대한광복회'는 어떤 단체?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 최고의 무장 항일 투쟁 결사체

등록 2019.10.02 17:27수정 2019.10.0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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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배한동)가 개최한 대한광복회 결성 104주년 기념식
2019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배한동)가 개최한 대한광복회 결성 104주년 기념식정만진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 대한광복회 결성지, 한국전쟁 당시 반격의 교두보를 마련한 다부동 전투까지, 나라가 어려울 때면 항상 대구시민들은 놀라운 애국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제71주년 국군의 날 기념사' 중 일부이다. 대통령의 언급 이후 '대한광복회'가 어떤 단체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과 다부동 전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왔던 탓에 새삼스럽게 이목이 집중될 법하기 때문이다.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

대한광복회는 제6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 단체'로 평가되어 있는 항일 결사체이다. 대한광복회는 광복회의 별칭이다. 1915년 8월 25일 창립 당시의 이름은 광복회였다. 독립운동가와 그 유가족들로 구성된 보훈단체 광복회와 혼동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대한' 두 글자를 덧붙여 부르게 되었다.

광복회는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립되었다. 그보다 전에 경북 영주에서 결성되어 활동해오던 채기중 등의 광복단, 대구 앞산 안일암에서 발족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박상진 등 강성 단원들, 그리고 산남의진 선봉장 출신의 우재룡 등이 앞장서서 창립을 이끌었다. 
 
 경주 소재 박상진 지사의 묘소로 들어가는 길 입구의 이정표
경주 소재 박상진 지사의 묘소로 들어가는 길 입구의 이정표정만진
 
광복회의 창립과 활동은 그 무렵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일대 사건이었다. 나라가 망한 충격과 일제의 무단정치에 짓눌려 독립운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기였다. 총독부는 2만여 명의 군경을 전국 각지에 주둔시켜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다. 일제 헌병에게는 재판없이 아무나 3개월 동안 구금할 수 있고 마구 폭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망국 5년 만에 광복회는 전국에 지부를 둔 거대한 조직체 건설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까지 지부를 설치했다. 길림광복회로 불리기도 한 광복회 만주지부의 초대 지부장은 이진룡이었고, 그가 피체된 후 2대 지부장은 김좌진이 맡았다.

전국 조직 갖춘 광복회, 군자금 모아 만주에 전달


광복회는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을 조달해주는 일에 주력했다. 영주의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가 발간한 〈대한광복단 기념공원〉에 따르면, 우재룡과 권영목은 현재 시세로 33억9천 만원에 이르는 군자금을 만주로 가서 김좌진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광복회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제의 세금 수송 마차를 탈취하고, 중석광을 습격하고, 친일 부호들에게서 의연금을 모았다. 우재룡과 권영만은 1915년 12월 24일 경주 효현교에서 세금 마차를 공격하여 4억 원을 빼앗았고, 채기중 등은 경상도 제일의 친일 부호로 허위 의병대장의 모금 운동을 일제에 고발한 장승원을 처단했다. 또 헌병 주재소를 들이쳐 무기를 탈취하기도 했다.


1919년 만세운동 후에는 임시정부와 연계 활동

1918년 1월 이후 광복회는 조직이 탄로나 총사령 박상진,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등 간부들이 순국의 비운을 맞는다. 이때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지휘장 우재룡과 권영만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한다. 이들은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다시 국내로 들어와 광복회 재건에 나선다.

재건 활동을 펼치면서 광복회는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주비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 지원을 준비하는가 하면, 뒷날 의열단 단원으로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김상옥과 한훈 등으로 암살단도 조직한다.

하지만 권영만이 대구에서 피체되고 우재룡이 군산에서 일제에 붙잡히면서 광복회는 완전히 해체된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21년 6월 11일자 지면에 '광복회 수괴 우이견(우재룡의 별명)'이 '대정 6년(1921년) 이래로 교묘히 종젹(종적)을 감초엇다가(감추었다가) 잡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겨졌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대구 두류공원의 우재룡 흉상과 공적비
대구 두류공원의 우재룡 흉상과 공적비정만진
 
1920년대 의열단은 1910년대 광복회의 후신

광복회의 젊은 단원들이었던 황상규, 김대지 등은 만주에서 김원봉, 이종암 등을 독려하여 의열단을 결성시킨다. 의열단은 광복회의 이념과 투쟁 방략을 이어받아 1920년대의 무장 항일 투쟁을 주도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광복회의 '의협 투쟁은 1920년대 의열 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라고 평가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술은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토대를 광복회가 구축했다는 뜻이자, 의열단 등 1920년대 의열 투쟁의 기반도 광복회가 놓았다는 의미이다. 광복회 간부들이 대대적으로 피체된 때가 1918년 상반기, 만세운동이 일어난 때가 이듬해 3월 1일, 의열단 결성이 11월 10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시기적으로 충분히 납득이 되는 설명이다.

광복회 기념 공간은 창립지인 달성공원이 적지

대구시는 광복회 기념 공간 신설을 준비하고 있다. 당연히 장소는 광복회가 창립되었던 달성공원 경내이다. 기자는 대구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광복회 기념 공간이 문을 열면 많은 국민들이 방문해 주십사 미리 당부를 드린다. 독립운동정신 계승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에만 할 일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어야 마땅한 국가적·민족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광복회가 처단한 대표 친일 부호 장승원의 구미 집이 일부 남아 있는 모습
광복회가 처단한 대표 친일 부호 장승원의 구미 집이 일부 남아 있는 모습정만진
#광복회 #박상진 #우재룡 #의열단 #채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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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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