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소재 박상진 지사의 묘소로 들어가는 길 입구의 이정표
정만진
광복회의 창립과 활동은 그 무렵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일대 사건이었다. 나라가 망한 충격과 일제의 무단정치에 짓눌려 독립운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기였다. 총독부는 2만여 명의 군경을 전국 각지에 주둔시켜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다. 일제 헌병에게는 재판없이 아무나 3개월 동안 구금할 수 있고 마구 폭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망국 5년 만에 광복회는 전국에 지부를 둔 거대한 조직체 건설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까지 지부를 설치했다. 길림광복회로 불리기도 한 광복회 만주지부의 초대 지부장은 이진룡이었고, 그가 피체된 후 2대 지부장은 김좌진이 맡았다.
전국 조직 갖춘 광복회, 군자금 모아 만주에 전달
광복회는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을 조달해주는 일에 주력했다. 영주의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가 발간한 〈대한광복단 기념공원〉에 따르면, 우재룡과 권영목은 현재 시세로 33억9천 만원에 이르는 군자금을 만주로 가서 김좌진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광복회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제의 세금 수송 마차를 탈취하고, 중석광을 습격하고, 친일 부호들에게서 의연금을 모았다. 우재룡과 권영만은 1915년 12월 24일 경주 효현교에서 세금 마차를 공격하여 4억 원을 빼앗았고, 채기중 등은 경상도 제일의 친일 부호로 허위 의병대장의 모금 운동을 일제에 고발한 장승원을 처단했다. 또 헌병 주재소를 들이쳐 무기를 탈취하기도 했다.
1919년 만세운동 후에는 임시정부와 연계 활동
1918년 1월 이후 광복회는 조직이 탄로나 총사령 박상진,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등 간부들이 순국의 비운을 맞는다. 이때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지휘장 우재룡과 권영만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한다. 이들은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다시 국내로 들어와 광복회 재건에 나선다.
재건 활동을 펼치면서 광복회는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주비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 지원을 준비하는가 하면, 뒷날 의열단 단원으로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김상옥과 한훈 등으로 암살단도 조직한다.
하지만 권영만이 대구에서 피체되고 우재룡이 군산에서 일제에 붙잡히면서 광복회는 완전히 해체된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21년 6월 11일자 지면에 '광복회 수괴 우이견(우재룡의 별명)'이 '대정 6년(1921년) 이래로 교묘히 종젹(종적)을 감초엇다가(감추었다가) 잡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겨졌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