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8년 12월 27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밥상이 힘이다'라는 주제로 열린 농업인 초청 간담회에서 중학생 농부인 한태웅 군(15)이 직접 수확한 쌀 5kg을 전달받고 있다. 한 군은 경기도 안성에서 할아버지를 도와 직접 농사에 참여해 이 쌀을 수확했다. 한 군의 취미는 농사, 장래희망은 대농(大農)이다. 문 대통령은 답례로 기념시계를 전달했다.
연합뉴스
"우리 농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 (MAKE OUR FARMERS GREAT AGAIN!)"
"농민은 식량안보를 지키는 공직자"라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으로 착각할 수 있겠으나 이 말을 한 주인공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자신의 정치적 지지 기반인 중서부 농업지역 팜벨트 농민(거대 농장주)들을 겨냥해 호기롭게 날린 한마디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중국과 우리나라 등을 거론하며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들이 WTO에서 개도국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고 미 무역대표부(USTR)에 지시했다. 또 "WTO 개도국 지위를 유지할 경우 미국과의 교역에서 손해를 감내"해야 할 것이라는 엄포도 덧붙였다. 미국 측은 개도국 간주 국가 수 제한과 관련한 시점을 못박았는데, 10월 23일까지 실질적 진전이 없으면 일방적으로 행동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WTO는 다자 간 무역협상으로 164개의 가입국 간 협상을 통해 새로운 규범이 마련되는 회의체이다. 그러나 회원국 사이에 이해 충돌로 협상이 늦어지면서 이해당사국들이 별도의 협상을 통해 무역협상을 진행하는 FTA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등을 포함 16개의 FTA를 체결, 발효 중에 있다.
특히 미국과 FTA를 체결한 이후 7년차(2018년) 기준, 대미 농식품 수출액은 8억 달러로 전년 대비 7.6% 증가한 반면 수입액은 93.7억 달러로 전년 대비 19.7%가 늘어나 매년 농업 분야의 대미 적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사정이 이러한데도 사실상 WTO 협상의 방해꾼이라고 불려왔던 미국이 돌연 WTO개도국 지위 문제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제 규범을 무시한 협박 정치를 일삼는 트럼프 노믹스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쌀을 내주고 지켜온 개도국 지위
WTO 개도국 지위는 회원 당사국의 선택과 다른 회원국의 암묵적인 동의에 따르고 있다. 이른바 '자기 선언(Self-declaration)'의 원칙에 맡기는 것이다. 물론 회원국들의 암묵적 동의는 농업을 포함한 개방 이행계획서에 대한 검증 결과를 반영하게 된다. 1996년 WTO 출범 직전 쌀에 대한 의무수입(MMA)를 약속한 우리나라는 농업기반의 취약성, 식량 자급률의 하락 등을 근거로 개도국 유지를 선언했다.
이후 WTO 각료회담이 열릴 때마다 개도국 지위 문제는 논쟁이 돼 왔으며 그때마다 쌀 시장을 조금씩 열어주면서 협상을 이어왔다. 2005년에는 추곡수매제 폐지와 의무수입물량(MMA) 확대, 밥쌀 및 국가별 쿼터 등 부가적인 협상안을 내주며 개도국 지위를 지켜왔으며 2017년에는 쌀 관세화 전환을 선언했다.
이렇게 쌀 시장을 단계적으로 개방하면서까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려 했던 것은 선진국 전환 시 모든 농산물에 대한 대폭적인 관세 인하와 각종 보조금의 삭감이 불가피하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농업분야 개도국 우대 조항에 따라 수입쌀에 대해 513%의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있었기 때문에 쌀 관세화 개방을 선언할 수 있었다.
엄습하는 삼각파도, 위협 받는 식량주권
현재 논의가 중단되어 있는 도하개발아젠다(DDA) 농업협상의 최종 수정안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은 특별품목 12%, 민감품목 5.3% 등 농산물업종코드(HS코드)에 등록되어 있는 품목 중 최대 17.3%에 대해 관세 감축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95년 당시 관세율의 평균 24%를 10년간 나눠 감축하도록 되어 있다.
반면 선진국은 전체 농산물의 4%만 민감 품목으로 보호하고 나머지는 관세를 대폭 깎아야 하며 특별품목도 활용할 수 없다. 또한 6년간 평균 36%의 관세를 감축해야하며 농산물업종코드(HS코드)별로 최소 15%의 관세를 추가적으로 감축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된다.
더구나 개도국에게는 농업생산액의 10%까지 인정되는 허용 보조금(de minimis)이 선진국에게는 5%까지만 인정될 뿐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 농업보조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감축보조(AMS)금 역시 절반 이상 감축하게 되어 쌀 변동직불금의 재원이 되는 보조금이 총액 기준 1조4900억 원에서 7000억 원대로 감축될 우려가 있다. 특히 수입쌀에 부과되는 513%의 관세를 393%~154%까지 낮춰야 해서 국산 쌀값이 수입쌀보다 1.4배에서 3.5배까지 비싸지게 된다. 이는 쌀 농업의 파국을 가져올 것이 자명하다.
결과적으로 곡물자급률 20%, 평균 경작면적 1ha미만 농가 70%, 65세 이상 고령농민이 40%가 넘는 우리나라의 농업 현실에서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게 되면 정상적인 농업농촌이 유지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바다에서 일을 하는 뱃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삼각파도라고 한다. 한번 휩싸이게 되면 빠져나올 수 없는 암흑 같은 죽음의 파도에 우리 농업이 내몰리고 있다. 당연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의 위기는 국민의 식량주권과도 직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