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에 위치한 안면도
정지인
걷기 좋은 안면도 해변길
한참 전, 11월의 어느 날. 충남 태안 안면도에 있는 백사장 항구부터 꽃지해변까지 걸었다. 안면도는 고즈넉한 해안풍경과 쭉 뻗은 안면송(안면도에서 자라는 소나무)이 마음에 들어 가끔씩 발길을 향하던 곳이다.
그곳에 새로 도보 길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찾았다. 싱싱한 수산물이 모이는 곳으로, 장을 보거나 꽃게탕을 먹기 위해 갔던 백사장항, 아담한 방포해변, 노을이 아름다운 꽃지해변은 모두 여러 번 들렀던 곳이다. 그곳들을 하나의 길로 이어서 쭉 걸어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총 12km의 도보길 구간을 걷는 데는 대략 5시간 정도가 걸렸다. 걷다 지치면 앉아 쉬고, 매서운 바닷바람을 피해 몇 번이나 옷깃을 여미고 모자를 눌러썼다. 길가에 놓인 식당에서 칼국수로 체력을 보충하고 꾸역꾸역 걷다 보니 드디어 종착지 꽃지해변 주차장에 다다랐다. 때마침 백사장항으로 돌아가는 읍내 버스가 들어와 얼른 올라탔더니, 출발하기 전에 차를 세워 두었던 백사장항까지 금방 도착한다. 길고 힘든 도보에 비해 허무할 만큼 짧았던 버스 이동은 여러 생각이 들게 했다.
도보로는 식사 시간과 쉬는 시간을 빼도 대략 3시간 반에서 4시간 걸리는 코스가 차량으로 이동하니 딱 20분이 걸렸다. 산길이나 우회로가 많지 않고 해변 길과 찻길이 거의 평행하게 나 있어 실제 이동 거리에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이렇게 쉽게 이동할 수 있는데 난 도대체 왜 일부러 걸은 거지.
'사이'와 '과정'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다
걸었을 때를 다시 떠올려본다. 걷다가 작고 예쁜 해변을 발견한다. 고즈넉한 풍광이 마음에 꼭 든다. 이런 해변이 여기 숨어있는지 전에는 미처 몰랐다. 길가에 핀 작은 풀도 눈에 들어온다. 이런 식물들이 안면도에 서식하고 있구나. 지저분하게 방치된 생활폐기물과 쓰레기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계속 걷는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해변이 나온다. 역시 아름답다. 사람이 붐비는 한창때를 지난 고요한 해안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어지는 해안선과 해송군락지에 감탄하며 계속 걷는다. 이번엔 걷기 불편한 길들이 펼쳐진다. 구불구불한, 거칠고 약간은 외지고 스산한 길이다. 갑자기 개가 나타나 컹컹 짖는 바람에 깜짝 놀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생각해보니 외딴집을 지키고 있던 개를 놀라게 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다. 늙은 어부가 살고 있나. 바닷가에 외롭게 서 있는 허름한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생각하며 길을 이어 간다.
그날 나는 안면도 해변 길을 걸으며 점과 점 사이의 선을 경험했다. 백사장항도 잘 알고 꽃지해변도 가봤지만 그 점과 점 사이에 그런 아름다운 풍경과 삶이 놓여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목적지와는 다른 뭔가가 그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사이'와 '과정'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과정이 주는 가치를 새롭게 깨우친 시간이었다.
만약 그 길을 차로 20분 만에 이동했더라면 목적지에 빨리 다다라서 편한 대신에 이름 없는 작은 해변도, 길가에 놓인 풀꽃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걸으면서 느낀 소소한 감흥도 없었을 것이다. 느리지만 두 발로 천천히 걸어갔기에 풍성한 4시간을 선물 받았다. 느린 여행이 주는 재미와 충만함을 맛본 것이다.
인생도 여행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뤄야 할 목표에만 집중하며 과정은 뒷전에 두고 있지 않았나 되돌아본다. 목표달성만큼이나 과정 역시 소중하게 여긴다면 또 다른 일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느린 여행에서 배우는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