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 표지
위즈덤하우스
김종성 기자는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신채호 선생을 '지난 1천 년간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역사가'라 말한다. '지난 1천 년간 역사학계가 숨기고 감춘 진실을 그가 소리 높여 외쳤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신채호 선생 또한 <조선사 연구초>에서 고려 때 묘청과 김부식의 대결을 '조선 역사 1천 년 이래 최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는 사실. '김부식이 묘청의 혁명을 진압하고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부터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역사관이 사라지고 사대적이고 퇴보적인 역사관이 이 땅을 지배했다'고 덧붙였다.
놀랍게도 김부식이 휘둘렀던 재갈은 오늘 날 친일 사학자들 손에 쥐어져 이미 죽고 없어진 신채호의 입을 꽁꽁 틀어막고 있다. '독립운동이라는 현실적 이해관계에 얽매인 사람의 역사 연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종성은 '신채호의 행적을 추적해보면, 독립운동이 역사 연구에 지장을 주지 않았음을 얼마든지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단 신채호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기는 했지만,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였다. 그는 조선왕조의 부활을 위해, 혹은 조선 기득권층의 권력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고, 오로지 평범하고 힘없는 서민들이 자유를 누리고 보호를 받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독립운동을 했다.
무정부주의자였기에 신채호는 한국을 편들지도 않았고 중국을 편들지도 않았고 일본을 편들지도 않았다(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한 그는 5월, 타이완에서 체포되었다. 1930년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1936년 옥중에서 뇌일혈로 순국했다). 오로지 한국 상고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그였기에 오늘날 우리가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신채호가 뤼순감옥에 투옥 중일 때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엮은 것이고, 옥사로 인해 연재가 멈춰진 부분이 '백제부흥운동'까지였기에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원문은 지금의 우리말과 큰 차이가 있는데다가, 수감 중에 작성된 탓에 신채호의 기억력에 의지한 부분이 많아 연도나 명칭 등에 다소 오류가 있다. 김종성은 원문을 현대어로 바꾸고, 명백한 오류를 바로 잡고, 해설과 주석을 추가함으로써 독자들이 신채호의 역작을 온전히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