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묵축제 설치작품택당 이식 선생께서 간성(지금의 고성군 간성읍)현감으로 있을 때 지은 ‘환목어’란 시가 종이로 만든 도루묵 조형과 함께 도루묵축제장에 설치됐다.
정덕수
도루묵을 한자어로는 환목어(還木魚)·환맥어(還麥魚)·도로목어(都路木魚)라고도 하며 목어(木魚) 또는·은어(銀魚)·로 부른다. 이 고기를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도로묵·도루무기·돌목어라 하며 소금에 절여 구어 먹거나 조림과 찌개로도 이용했다.
명태의 새끼인 노가리를 닮은 외관으로 몸길이는 최대 25∼26센티미터 정도 된다. 몸체가 가늘고 길며 측면이 편편한데 알을 밴 암놈은 시기에 따라 배의 형태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평상시는 수심 100∼400m의 해저 모래진흙에 서식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산란기인 초겨울이 되면 물이 얕고 해조류가 무성한 곳으로 모여드는데 이때 어부들이 그물을 내려 잡는다.
일본으로부터 고구마 종자를 사들여 재배를 장려한 조선시대의 정치가며 실학자인 서유구(徐有榘/1764∼1845)가 쓴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는 "관동의 북쪽 바다에서 잡히는데 비늘이 없는 작은 물고기이다. 길이는 세 치(대략 10cm)가 안 된다. 복부는 불룩하면서 둥글지만 꼬리 근처는 깎여 있다. 입은 크고, 꼬리는 좁고, 등골은 조금 검다. 배와 옆구리는 운모가루를 발라놓은 듯 빛나며 하얘서 토박이들은 '은어銀魚'라고 부른다. 매년 9~10월에 그물을 쳐서 잡는데, 남쪽으로 가서 팔면 이익을 많이 얻는다."고 하였다.
이를 미뤄 서유구 선생께서 도루묵을 머리부터 꼬리까지가 아닌 몸통만 전체 길이로 본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복부는 볼록하면서 둥글지만'이라 한 대목도 암도루묵만을 본 게 아닌가 생각되고. 그리고 여기에서 '남쪽으로 가서 팔면 이익이 많이 남는다'는 얘기는 양양도호부(지금의 양양군)나 강릉대도호부(지금의 강릉시) 정도로 운송해 팔았으리라 본다.
도루묵으로 불리며 還目魚(환목어)로 불린 흔적은 광평대군 이여의 후손으로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직후 공조참판이 되었던 정조시대의 인물 이의봉(李義鳳)이 편찬한 고금석림(古今釋林)에서 찾을 수 있다. 이의봉은 고금석림 외에도 '산천지(山川志)'와·'나은예어(懶隱囈語)'를 편찬할 정도로 학문적 깊이가 남다른 인물이다.
고금석림에 따르면 '고려의 왕이 동천(東遷)하였을 때 목어를 드신 뒤 맛이 있다 하여 은어로 고쳐 부르라고 하였다. 환도 후 그 맛이 그리워 다시 먹었을 때 맛이 없어 다시 목어로 바꾸라 하여, 도로목[還木]이 되었다'고 밝혀놓은 걸로 민족문화대백과 등에 기록되어 있다.
도로란 말, 즉 본디의 위치로란 말이 도루로 바뀌었고, 현대에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것도 부족해 다른 나라로 망명까지 시도하였기에 그를 욕보이고자 억지를 부린 건 아닌가 싶다.
심지어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이 발생하자 가장 먼저 대전으로 줄행랑을 놓은 상태에서 정부는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기만방송을 한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승만이 목어를 먹으며 은어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선조나 이승만 모두 국민을 버리거나 기만한 건 똑 같으며 이와 같은 어이없는 역사가 반복됨도 슬픈 일이다.
택당 이식 선생이 간성현감으로 좌천되어 지금의 고성군 간성읍에 와 있던 시기(1632~1633)에 지은 시로 알려진 환목어(환목어)에서도 임금이 난을 피해와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마침 이식 선생의 환목어가 이번 양양 물치 도루묵축제에 전시되어 있다.
還目魚(환목어)
有魚名曰目(유어명왈목) 목어라 부르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海族題品卑(해족제품비) 해산물 가운데서 품질이 낮은 거라.
膏腴不自潤(고유부자윤) 번지르르 기름진 고기도 아닌데다.
形質本非奇(형질본비기) 그 모양새도 볼 만한 게 없었다네.
終然風味淡(종연풍미담) 그래도 씹어보면 그 맛이 담박하여
亦足佐冬釃(역족좌동시) 겨울철 술안주론 그런대로 괜찮았지.
國君昔播越(국군석파월) 전에 임금님이 난리 피해 오시어서
艱荒此海郵(간황차해수) 이 해변에서 고초를 겪으실 때
目也適登盤(목야적등반) 목어가 마침 수라상에 올라와서
頓頓療晩飢(돈돈료만기)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해 드렸지.
勅賜銀魚號(칙사은어호) 그러자 은어라 이름을 하사하고
永充壤奠儀(영춘양전의) 길이 특산물로 바치게 하셨다네.
金輿旣旋反(금여기선반) 난리 끝나 임금님이 서울로 돌아온 뒤
玉饌競珍脂(옥찬경진지) 수라상에 진수성찬 서로들 뽐낼 적에
嗟汝厠其間(차여측기간) 불쌍한 이 고기도 그 사이에 끼었는데
詎敢當一匙(거간당일시) 맛보시는 은총을 한 번도 못 받았네.
削號還爲目(삭호환위목) 이름이 삭탈되어 도로 목어로 떨어져서
斯須忽如遺(사수홀여유) 순식간에 버린 물건 푸대접을 당했다네.
賢愚不在己(현우부재기) 잘나고 못난 것이 자기와는 상관없고
貴賤各乘時(귀천각승시) 귀하고 천한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지지.
名稱是外飾(명칭시외식)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
委棄非汝疵(위기비여자) 버림을 받은 것이 그대 탓이 아니라네.
洋洋碧海底(양양벽해저) 넓고 넓은 저 푸른 바다 깊은 곳에
自適乃其宜(자적내기의) 유유자적하는 것이 그대 모습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