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에 대하여> 앞 표지
최우현
먼저 소개할 화자는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다. 서경식 교수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2세로 일본의 민족차별 문제(특히 재일조선인)와 일본 사회의 우경화, 국민주의의 위험 등을 알리는 학술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 맞은편의 지성으로는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가 자리한다. 사상 연구자이자 철학자인 그는 일본의 역사인식과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적 학술활동을 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연구를 일관되게 이어온 인물이다. 앞서 두 사람은 20여 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벗'이자 '스승'으로서 존중해왔다.
책의 제목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일본의 책임'에 대한 문제를 주로 논의한다. 다만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닌 관계로 일본이 어떠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 나열에 중점을 두진 않는다. 이 책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잘못의 나열'보다 잘못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일본의 심성(心性) 그 자체다. 두 사람은 그러한 심성이 대체 언제부터 기인했으며 현재는 어떻게 남아 일본이라는 나라를 흔들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책임을 외면해온 결과 : 무력한 국민의 탄생
오늘날의 일본은 부총리가 "(헌법 개정은) 나치스(Nazis)의 수법을 배워서"라고 실실 웃으며 말해도, 총리가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통제되고 있다"라는 따위의, 본인도 국민도 아는 거짓말을 해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 다수도 그것을 용인하거나 어쩌면 오히려 환영하는, 악몽 같은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p. 21)
과거에는 그중 하나만으로도 정권을 무너뜨렸을 수많은 실정과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아베 신조 정권이 장기화되어서, 민주 정치를 토대에서부터 파괴하는 '모럴의 붕괴'가 진행 중이다. (p. 9)
일본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봤을 법한 질문이지만 뭐라 답을 하기에는 참 애매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답한다. 그것은 바로 '책임을 외면해온' 결과로 빗어진 현실이라고 말이다.
두 사람의 설명은 대체로 이렇게 요약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무게감이나 불편함을 회피해온 일본의 오래된 습관이 "스스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무력한 국민'을 만들어 냈다는 논리다.
(지금의 일본은) 책임을 묻는 것 자체를 '폭력'이라며 기피하지요. 그렇게 하면 당연히 책임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 그 책임의 하중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홀가분하겠지요. 일본의 경우에는 그것이 전쟁 책임이나 식민 지배 책임을 불문에 붙여 온 '저지먼트(판단)의 부재'라는 현실을 다시금 정당화한다고 할까, 현상을 바꿀 수 없게 만드는 큰 요인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는 합니다. (p. 47)
책임의식이 희박하거나 부재하는 문제는 개인 의식의 미발달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일본 국민 다수의 대세 순응주의나 동조주의의 심성을 의식 깊숙한 곳에서 규정하고 있다. (p.6)
이를테면 일본은 1990년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시작됐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에 반성적으로 응대하기는커녕 거의 귀를 막다시피 거부해 오고 있다. 외려 피해자들을 향한 비난에 나서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인정하고 잘못을 반성하지 않겠다는 격렬한 '반동'(반발)이 일어났던 것인데, 대표적으로 '역사 수정주의'라던가 국기국가법(1999), 주변사태법(1999) 제정과 같이 애국 내셔널리즘적 논조가 만연했던 현상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나아가 두 사람은 책임을 회피하는 이같은 일본의 태도가 어느 날 툭하고 발현된 것이 아닌, 제국 일본 당시부터 내재돼 있던 '식민주의적 본성(本性)'이 드러난 것이라는 데 방점을 찍는다. 즉, 가면 속에 감춰뒀던 일본의 어두운 본모습이 드러났다는 뜻이다. 서경식 교수는 이를 두고 겉만 번지르르한 "도금(鍍金)이 벗겨진" 것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피해자의 호소? 침묵한 일본 국민
가끔씩 나쁜 것은 일본 사람이 아니라 '아베 총리', 즉 일본 정권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 말에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고자는 의도는 없다. 하지만 정말로 일본 사람들에게 '전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일본 사람들이 책임에서 도망가려 하는 내재적인 본성, 즉 '무의식적 식민주의'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식민주의'란 어떠한 국가가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지배하려는 이념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다. 이에 일본의 식민주의란 일본이 주변 국가들에 비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우월하다는 차별과 배외 의식, 즉 제국 일본 시대의 사고방식을 이야기한다. 다카하시 교수는 현대 일본의 본성, 즉 식민주의는 1868년 메이지 시대부터 1945년 패전까지 일본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바라본다.)
두 사람에 의하면 일본인에게는 직접 말하거나 표현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식민주의가 있다고 한다. 다카하시 교수는 이를 일본 사회의 "권력적 침묵"이라고 표현한다. 이 권력적 침묵이란 상대적인 위치가 우위에 있는 자, 즉 식민지를 예로 들면 지배자 측(일본)은 피식민자(한국)가 제기하는 질문, 비판, 고발에 대해 '침묵만 지켜도'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요즘 일본인들이 '과거 조상들이 저지른 전쟁범죄가 내 잘못도 아닌데 왜?'라며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현상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자면, 전쟁범죄의 책임을 물어야 할 가해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식민지 지배나 전쟁 또한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라는 논리다.
이 또한 표현방식은 다르지만 식민주의, 즉 타민족에 대한 배외 의식과 강압을 내포하고 있다. '식민주의적 심성'인 것이다. 반면, 고통을 지속하고 있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후손인 그들에게 배상과 보상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본의 내재된 식민주의, 이 침묵을 그대로 바라만 봐야 한단 말인가?
다카하시 교수는 "응답 책임"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응답 책임이란, 일단 사실을 '알아버렸다면' 그에 '응답할 책임'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응답 가능한'(responsible) 이상 응답할지 말지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의 태도는 침묵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견지에서 위와 같은 '권력적 침묵'을 견지해온 것이다. 이는 과거의 일이니까 나와는 상관없다는 일본인의 내재된 '식민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일침과도 같다.
지금을 사는 젊은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와 그 전쟁범죄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 조상들의 가해사실을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피해자로부터 날아오는 비판, 질문, 호소에 침묵하는 것은 응답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응답 책임'은 최소한의 책임이다. 다카하시 교수는 책임에서 도망가려는 일본 사람들의 내재적인 본성 '무의식적 식민주의', '권력적 침묵'이 극복되어야 하며 그 시작이 "응답 책임"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드러나는 식민주의
이렇게 일본 사람들에게 내재된 식민주의와는 달리 겉으로 드러난 일본 식민주의의 모습은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다. 두 사람은 이것을 "일본식 보편주의"라는 용어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구상하는 것만이 '보편'임을 내세워 다른 국가들과의 대화를 단절하는 것이다.
예컨대 과거 일제 침략전쟁의 사상적 슬로건이 된 '대동아공영권'의 경우 일본제국의 입장에서야 보편주의, 즉 아시아의 공영을 논한 것이 될 수 있지만, 조선 등 피지배국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적 세계"를 강요당하는 것이 된다. 서경식 교수는 실제 조선의 독립운동이 "보편적 가치에 대한 개별적 도전"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탄압당해 왔음을 지적한다.
조선인의 민족 독립운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개별적 도전이라는 레토릭으로 끊임없이 탄압당했습니다. 그것은 치안유지법의 논리인데, 예컨대 옥사한 시인 윤동주의 판결문에도 그 사상이 적혀 있지요. (p. 215)
또 자신들이 구상한 세계만을 '보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보니 한국이나 오키나와 같은 피식민지 국가들의 주장을 편협한 '내셔널리즘'인 양 취급해버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서경식 교수는 한 예로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대립적으로 받아들여 한국과의 "충돌"이라는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서 교수의 말대로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한일 간 충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쌍방 대화의 문제임에 분명하다. 다만 '위안부=역사적 충돌의 상징'으로 여기는 일본식 보편주의, 식민주의적 심성은 이러한 대립을 부추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