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조병갑 선정비 안내문'.
함양군청
조병갑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웃음거리의 하나는 경상남도 함양에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진 일이다. 함양읍 상림 북측 역사인물공원 앞엔 <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라는 이름의 조병갑 선정비가 세워졌다.
"조선말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케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 (1887) 7월에 비를 세웠다." 는 내용의 비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 시절에 조병갑만이 탐관오리였던 것도 아니다. 전라감사 김문현의 탐학도 이에 못지 않았다. 전운사(轉運使) 조필영이 전운영(轉運營)의 세미를 운반하면서 운임 · 유실 등의 조건으로 정량보다 더 거두어 들이고 서울로 수송한 뒤에는 부족미의 명분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조필영은 풍양조씨로 조대비의 배경을 업고 농민들의 뼛골을 짜냈다. 여기에 균전사(均田使) 김창석은 농민들에게 묵은 토지를 개간하면 일정 기간 동안 세금을 내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하고서는, 농민들이 추수할 때는 관리들을 동원하여 도조를 빼앗아 갔다. 이중삼중의 수탈에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유리걸식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이와 같은 수령들의 탐학이 전라도 일대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전라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부패한 왕조의 말기증세였다. 견디다 못한 고부의 농민들이 부정의 사례를 적은 민장(民狀)을 들고 조병갑을 찾아가 등소(等訴)라는 이름의 이른바 '선처'를 호소하려다가 옥에 갇히거나 관아 마당에서 내쫓기었다. 이래저래 고부 농민들의 원성은 하늘에 닿고 그들은 급속하게 결속되어 갔다. 이때 메시아처럼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등장하고 평소 신뢰받은 인격이었던 이들은 전봉준의 개인적인 원한까지 겹쳐서 조병갑을 비롯한 탐관오리들의 숙청에 감연히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