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무덤집에서 조금 걸어 바닷가에 나가면, 바닷가 무덤이 있다. 야트막하게 주변과 어우러진 무덤. 거부감없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맞아주는 듯하다. 삶과 죽음은 우리 곁에 자연처럼 이렇게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이진순
언제부터였을까? '부모'라는 단어만으로도 내 눈물샘이 터져버리곤 하는 증상이 생긴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내가 그동안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내 삶의 조건으로 여겼던, 그래서 전혀 특별할 것 없던 '부모'라는 존재가 한 인간으로 내 마음에 다가오기 시작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지금 아버지가 계신 요양병원이 최선의 선택일까라는 생각에 의문이 들지만, 현재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듯하여 잘 안 삼켜지는 묵직한 것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지금 혼자 살아가고 계신 어머니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다. 늙은 어머니, 그리고 늙어가는 내가 일상을 함께 티격태격 해가면서 살아가는 그림도 그려본다. 이런 선택이 어머니의 삶을 조금은 더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 있으려나? 그리고 또한 내 눈물조절장애를 조금은 완화시켜줄 수 있으려나?
존엄하게 늙는다는 것
어머니는 늙어서 아프면 집에서 그냥 누웠다 죽으면 되지 왜 병원을 가냐고 하신다. 예전 할머니가 그렇게 집에서 돌아가셨고,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그런 죽음이 병원에서의 죽음보다 훨씬 익숙한 것이다. 2년 전쯤, 아버지가 심하게 아프시면서 부모님의 삶과 죽음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을 즈음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이란 책을 읽었다.
그 책에서도 집에서 안전하게 살다가 죽어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색을 하고 있다. 내 삶의 주요 단어 중 하나가 된 '자연스러움'의 관점에서도 자신이 살던 집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듯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최상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과도하게 병원에 의지하게 된 우리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라도 어떻게든 조금은 되돌려놓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도 연결된 것이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해본다.
이를 위해서는 개별 가족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인간의 삶 전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살기 위하여' 인간 삶에서 너무나 핵심적인 많은 것들을 버리고 달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달에는 부모님을 보기 위해 고향 친구와 같이 내려간다. 지금으로선 요양병원에 홀로 누워계신 아버지와는 원하는 만큼의 대화가 힘들지도 모르겠다. 한 달 전 일반병원에서 봤을 때만 해도 돌 많은 돌섬이 차 많은 차섬이 되었다며,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차조심하라고 딸의 안전을 염려했던 아버지였는데... 그리고 또 혼자 집에서 생활하고 계신 어머니랑 짧은 며칠이지만 맛있는 요리해서 같이 먹고 수다 떨며 지내야겠다. 여전히 눈물조절장애를 겪고 있는 터라 아직 만나지도 않은 지금부터 헤어짐의 시간이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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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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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치원'에 가는 구순 엄마, 눈물조절장애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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