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제6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을 수상한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연맹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여성노동자들.
한국여성노동자회
왜 40년 전과 지금이 비슷해야 하나
1979년 YH노조의 투쟁 과정 중 사망한 김경숙 열사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수상하는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을 40년 뒤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노동자가 받는 장면은 다른 시간대의 두 주인공이 만나는 영화 속 한 장면에 가까웠다. 그 40년 사이에 한국사회는 개발도상국에서 원조국으로 전환할 만큼 압축성장을 이뤄냈지만, 1979년의 여공과 2019년의 요금 수납원이 처한 현실은 이상할 만큼 닮아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여성 노동자에게 힘찬 인사말을 전하기 위해 자리에 참석한 최순영 전 YH노조 위원장은 70년대 민주노동조합 결성을 이끌었던 "여성 노동자의 노력을 통해 세상이 변화되어 왔다"고 강조했지만, 한편으로는 최근 20대 여성 노동자를 만나는 기회를 통해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 노동자가 차별받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40년 전, YH노조는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 통보에 맞서 일터를 지키고자 했다. 자본금 100만 원으로 시작해 한때 4천여명 직원을 고용하며 가발 수출 산업에 일조했던 YH무역은 노조의 임금 협상에 불응하며 회사 문을 닫아버렸다. 가발 경기가 쇠락하고 있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사측의 방만한 운영과 내부 비리로 사운이 기운지 오래였고, 사주인 장용호는 이미 미국으로 도망친 뒤였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나선 것은 노조, '여성노동자'들이었다. YH노조는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공장과 기숙사에서 농성을 시작했으나, 유신정권 막바지 민주 노조 탄압이 극심하던 상황이었다. 경찰이 곧 들이닥칠 것이란 소문을 들은 노조는 고심 끝에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사로 농성지를 옮겼다.
당시 야당의 총수였던 김영삼 총재가 YH노조를 지원하는 형국이 되며 YH노조의 투쟁은 본격적으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불씨를 잡아당겼다. YH노조가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자 이에 긴장한 박정희 정권은 1979년 8월 11일 야당 당사에 경찰권력을 투입하는 초유의 사태를 벌였다. 이른바 '101진압작전'에서 노조원이었던 김경숙 열사가 사망하였고, YH노조의 간부와 배후로 지목된 이들이 구속된 상태에서 YH노조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직접 고용', 정규직 전환 그 이상의 의미
2019년 톨게이트 요금 수납 노동자의 대량 해고 사태는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뜨거운 운동 이후에도 여전히 제자리걸음 중인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지난 7월 1일, 한국도로공사 사장 이강래는 비정규직 여성 수납원 천오백여 명을 하루아침에 해고했다. 물론 그 밑 작업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어 온 것이었다. 97년 외환 위기 사태 이후 한국도로공사는 요금소 수납 업무를 점차 민간 업체로 외주화 해왔고, 2009년 이명박 정부 시기에 이르러 요금 수납원 전원을 계약직으로 전환했다. 위탁받은 민간 용역업체의 사장 자리는 도로공사의 명예 퇴직자에게 돌아가는 보직이 되었다.
톨게이트에서 길게는 20년 가까이 일해온 여성 노동자는 한국도로공사의 직원에서 용역업체의 계약직원으로 전락했다. 노동자들은 2013년부터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시작했고 5년 만에 이러한 고용 행태가 '불법 파견'임을 확인하며 승소했지만, 도로공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오백 명을 모두 직접 고용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한국노총 소속 톨게이트 직원 일부만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며 노동자를 갈라치기 하는 적반하장의 행태를 보였다.
결국, 수납원들은 도로공사 본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고 추석 명절을 앞둔 9월 10일 이들을 강제 해산하려는 남성 경찰 500여명 앞에서 상의를 탈의하며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