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면 머리기사로 강경대씨 사망 사건을 다룬 1991년 4월 27일자 <한겨레>
한겨레
"지구 한쪽에서 일어난 한 행위가 결국 지구 다른 쪽에서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나비효과'를 나는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아래는 필자가 9년 전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1991년 4월에서 6월 소위 '분신정국'이었다. 영국언론에서도 한국의 '분신정국'을 연일 보도했다.
당시 나는 무작정 영국에 유학 와서 영국의 장학단체에 장학금을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400만 원의 장학금을 신청한 한 장학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면담을 했다. 그리고 1991년 6월 나는 그 단체로부터 신청한 장학금보다 10배가 많은 4000만 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너무나 놀라웠다. "무슨 착오가 생긴 것인가? 신청 액수보다 많은 10배를 주다니!" 지도교수도 놀라고 너무 반가워했다. 자기 생전에 장학금을 신청한 것보다 10배나 더 준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나는 그 장학단체의 사무처장을 만났다. "아니 어떻게 신청한 장학금의 10배를 주시나요?"라고 놀라움에 물었다. 60대 초반의 나이가 지긋한 그 사무국장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단체에서 당신의 장학금 신청서를 검토 하는 기간 중 한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강경대 같은 분들이 한국에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당신이 노력 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장학금을 10배로 줍니다."
나는 놀라웠다.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젊은이 강경대의 죽음에 내가 큰 빚을 졌다. 그 후 나는 그 장학단체 등의 도움으로 영국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도 모르는 사람들로 인해 도움을 받는다. 앞서 말했듯이 1991년 4월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대학생 강경대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나를 구했다. 그래서 2000년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항상 강경대와 같이 억울하게 생명을 국가폭력에 의해 잃은 분들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노무현정부에서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그 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일을 했고 그 일을 통해서 국가폭력의 희생자인 다른 많은 강경대들을 만났고 그 분들의 눈물과 억울한 한을 보았다.
- '꿈을 포기 안해도 굶어 죽습니다'(2011년 2월 12일)
김기설 유서를 위기 돌파용으로 삼은 노태우 정권
강경대! 그의 삶과 죽음은 내 삶뿐만 아니라 곧 김기설과 강기훈의 삶에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1991년 4월 24일 강경대 치사 사건 후 2주가 지난 1991년 5월 8일, 김기설이 아침 8시 서강대학교 본관 옥상에서 온몸에 불을 지르고 분신 후 투신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현장에서는 김기설의 유서 2장이 발견되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김기설의 유서를 국정 전환 위기 돌파용 카드로 삼았다. 서울지검은 곧 김기설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아래 전민련) 동료 강기훈을 유서 대필자로 지목해 수사를 진행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아래 국과수)에 김기설의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감정을 의뢰해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이 동일하지만 유서와 김기설의 필적은 다르다"는 감정회신을 근거로 1991년 7월 12일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해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서울지검은 강기훈을 기소했다.
이어서 서울지법은 1991년 12월 20일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해 준 사실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인정해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그리고 서울고법이 유죄판결을 선고한 후, 대법원이 1992년 7월 24일 상고를 기각해 판결이 확정되었고, 강기훈은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94년 8월 17일 만기 출소했다.
이 사건이 발생한 1991년은 노태우 정권 후반기로 공안 통치, 김영삼·김종필과의 3당 합당 등 정치적 격변기였고, 수서지구 특혜분양사건, 국회의원 뇌물외유사건, 대구 페놀방류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 비리가 발생한 시기였다.
특히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되었고, 그 후 전국적으로 집회와 시위가 연이어 일어나는 등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높았다. 이 기간은 강경대의 죽음을 포함 모두 13명의 젊음이 노태우 정권에 항의해 분신, 투신, 의문사로 사망하는 유례없는 비극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반면 연일 계속되는 분신정국에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하고, 서강대 총장 박홍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근거 없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1991년 5월 8일 아침 김기설이 분신 사망하자 경찰은 분신 현장을 확인한 다음 사건 관계인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경찰은 검사의 지휘로 1차 현장검증을 했고, 서울지검 검사 및 수사진들과 2차 현장검증을 했으며, 당일 사건을 서울지검 강력부에 송치했다.
1991년 5월 13일 검찰은 강기훈에게 김기설을 소개받았다는 홍아무개의 진술을 받았고, 홍아무개는 이날 조사를 받으면서 김기설에게 받은 메모지와 함께 김기설이 자신의 수첩에 '복지다방 약도'와 '김기설의 전화번호'를 적었다면서 그 수첩도 검찰에 제출했다.
1991년 5월 14일 검찰은 강기훈의 형사사건기록을 입수했고, 1991년 5월 16일에는 강기훈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그리고 검찰은 유서를 비롯한 김기설과 강기훈의 필적에 대해 국과수에 필적감정을 의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