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최늘샘의세계방랑기세계 일주 여정을 표시한 지도. 미국 샌프란시스코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희망봉까지 이어진 분홍색 선이 아메리카-아라비아-아프리카로 여행한 535일 동안의 경로다.
유최늘샘
"안 죽고 돌아와서 고맙다. 앞으로 남은 인생 덤으로 산다, 생각하고 살아라."
강도를 만나고 전재산을 털리며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이 말했다. 내 몸에는 아직도 여행의 상처가 남아 있다. 왼쪽 관자놀이에는 콜롬비아에서 앓은 대상포진 자욱이, 오른쪽 복숭아뼈에는 에티오피아 강도가 남긴 흉터가 아릿하다. 친지들의 속을 꽤나 썩이며 때로 목숨을 걸어야 했던 기나긴 여정에서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이것은 여행인가 고행인가
2018년 5월, 사직서를 내고 세계 일주를 떠났다. 미국, 쿠바, 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포르투갈, 스페인, 모로코, 헝가리, 세르비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그리스, 터키, 조지아,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잠비아, 보츠와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도에 나오지 않고 이름도 없는 길들이 속세에 알려진 관광지보다 더 특별할 거라고 기대했기에, 비행기보다는 육로를 통해 이동했고 그러다 보니 여행자들이 잘 가지 않는 나라나 지역도 여행할 수 있었다.
주머니는 가벼운데 가고 싶은 곳은 많아서 여비를 아끼고 아꼈다. 누군가는 궁상맞다 말할지도 모르지만, 남들 만큼 돈을 벌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좀더 많은 자유를 찾겠다는 마음으로 살아 왔기에, 가난한 여행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535일, 귀국행 비행기삯까지 포함해 12,113,000원을 썼다. 월급 80만 원을 받던 시절부터 반지하와 옥탑방에 살며 아등바등 모은 돈이고, 인생에서 가장 큰 지출이었다. 한 달 평균 68만 원, 하루 평균 22,600원. 10개월 동안 아시아 23,000킬로미터를 여행할 때는 한 달에 30만 원이 들었는데, 아메리카, 아라비아, 아프리카는 이동량이 세 배 이상 많고 아시아 여행보다 물가가 비쌌다.
5천 만 인구 중 2,800만 명이 매년 해외로 나가고, 세상 모든 여행지가 인스타그램에 넘쳐나는 2020년 대한민국의 여행 문화와 조금 걸맞지 않게, 나는 '거지 여행자'라거나 '나그네'라는 이름이 꽤 어울리는 모습으로 지구를 떠돌았다.
한 장 있던 청바지는 1년 6개월을 입어도 쉬이 찢어지지 않았다. 반바지 두 장, 셔츠 세 장, 팬티 두 장. 20달러짜리 텐트와 침낭, 카메라와 삼각대, 손톱깎이와 빨랫줄 따위 잔잔한 생활용품까지 모두 담은 배낭은 9킬로그램. 장기 배낭 여행자치고는 가벼운 편이지만, 땡볕 아래 십 리만 걸어도 인생의 무게 마냥 무거웠다.
대상포진에 걸린 채 수면 마취제 강도를 당한 다음부턴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를 돌보자고 되뇌었지만, 웬만해선 어딜 가든 가장 저렴하고 낡은 교통수단과 숙소와 식당을 이용했다. 넉넉한 삶이 항상 좋은 삶은 아니듯, 가난한 여행이 항상 나쁜 여행은 아니다. 무모하다고 할 만큼 아무 곳에서나 텐트를 쳤고 터미널 바닥에 드러누워도 쉬이 잠들었다.
걷기 좋은 길을 만나면 활개치며 걷다가 지치면 번쩍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아리조나 사막, 니카라과 국경, 페루 해안, 파타고니아 골짜기, 보츠와나 등지에서 승용차와 덤프트럭, 오토바이와 나룻배까지 히치하이킹을 했고, 종종 호스텔 청소와 베이비시터, 영상 편집과 농장 일을 하며 숙식을 지원 받았다.
"여행 다니는 게 아니라 고행을 다니는 것처럼 보이네요."
동료 여행자가 염려해 주었지만, 몇 차례 사고를 당했을 때 말고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들을 걸었고, 하루 하루 지구에서 살아가는 별별 사람들의 미소와 슬픔을 마주했다. 나는 스와힐리어나 아랍어도 못하지만 영어도 잘 못한다.
가난하고 말도 못하는 내가 살아서 여행을 마칠 수 있었던 건 길 위에서 만난 숱한 사람들의 가없는 도움 덕분이다. 낯선 곳은 두렵고 여행자는 때로 위험에 처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나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험해진대도 의심과 경계보다는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남자니까 그렇게 여행할 수 있지"라는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시렸다. 여성과 남성은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다. 여성에게는 남성에게 없는 위험이, 세계의 모든 곳에 매일 매일 존재한다. 일상의 여성 차별을 세세히 인식하고 저항하는 남성으로 살고 싶다.
대문도 열쇠도 없는 시골집에 사는 어머니 귀자씨는 머나먼 나라를 여행 중인 자식의 무탈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오가는 손님들에게 밥을 대접했다고 한다. 돈도 잃고 건강도 잃고 꿈마저 잃었을 때, 동료와 친구, 여행기를 읽은 독자들이 든든한 밥값과 뜨거운 응원을 보내 주었다. 돌아보면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