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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위원으로 참여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 / 15회] 1896년 7월 2일 창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사회정치단체

등록 2020.03.13 16:11수정 2020.03.1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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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공원에 있는 서재필 동상, 독립협회 주도 인물 중 하나. 미국으로 밀항하여 가장 성공한 동양인 젊은이가 되었고,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었다. 죽을 때까지 미국인으로 살았다. 독립공원에 있는 서재필 동상, 독립협회 주도 인물 중 하나. 미국으로 밀항하여 가장 성공한 동양인 젊은이가 되었고,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었다. 죽을 때까지 미국인으로 살았다.
독립공원에 있는 서재필 동상, 독립협회 주도 인물 중 하나. 미국으로 밀항하여 가장 성공한 동양인 젊은이가 되었고,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었다. 죽을 때까지 미국인으로 살았다.독립공원에 있는 서재필 동상, 독립협회 주도 인물 중 하나. 미국으로 밀항하여 가장 성공한 동양인 젊은이가 되었고,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었다. 죽을 때까지 미국인으로 살았다. 신병철
1896년 4월 『독립신문』이 창간되고 7월에 독립협회가 설립되었으며, 1898년 3월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2년여 동안은 개화의 전성기였으며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가히 르네상스라 할 만했다. 주시경은 개화의 물결에 뛰어들어 뜨거운 열정을 바쳤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지 30여 년 뒤라서, 얼마든지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는 시기였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신문→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수구세력의 방해 없이 제대로 진행되었으면 한국의 역사는 망국의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았을 지 모른다.

협성회 회원이 300여 명에 이르면서 서재필은 좀더 조직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 독립협회의 창립이다. 1896년 7월 2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는 '독립협회 규직'을 제정하고 임원을 선출했다. 회장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위원에는 주시경을 비롯하여 김가진ㆍ김종한ㆍ민상호ㆍ이채연ㆍ권재형ㆍ현흥택ㆍ이상재ㆍ이근호, 감사원으로 송현빈ㆍ남궁석ㆍ오세창 등이 선임되었다.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으로 되어 있어서 간부나 회원이 되지 않고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독립협회는 첫 사업으로 독립문과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을 확정하고 각계의 지원과 회원가입을 호소하는 「독립협회 윤고(輪告)」를 채택하였다. 독립협회는 몇 갈래 세력이 연대하여 조직되었다. 온건 개화파인 건양협회세력, 주로 외교계 관료들로 구성된 정동구락부 세력, 이 두 세력에 가담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독립개화정책을 지지하던 독립파 세력이다.

"독립협회는 이상의 3개의 흐름의 세력을 모아서 창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위의 세 흐름의 세력과 독립협회와의 관계는 창립당시의 발족 위원들에 한정된 것이지 그 이후의 독립협회 조직의 발전과는 별개의 것임을 주의해 둘 필요가 있다." (주석 1)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 서울 광화문광장 북쪽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다.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 서울 광화문광장 북쪽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다. 김종성
 
독립협회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독립문ㆍ독립공원ㆍ독립관의 건립 등 창립사업에 주력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국민계몽ㆍ민력조성ㆍ민력단합을 통한 자주국권에 의한 근대적인 독립국가의 건설이었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사상, 자강개혁에 의한 문명국가를 세우고자하는 근대화운동의 추진에 목표를 두었다.

독립협회를 주도한 주요 회원들의 사상적 계보와 인적 계보를 보면 독립협회의 조직이 연합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두 개의 흐름은 ①서구시민사상을 도입하여 그 영향을 크게 받은 세력이고, ②다른 하나는 개신유학적 전통을 배경으로 동도서기파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국내사상의 성장의 흐름이다.


이밖에 위정척사파와 동학과 기독교의 영향도 있으며, 인적 계보로 볼 때에는 신지식층 이외에 시민층ㆍ농민층ㆍ노동자층 및 해방된 천인층 등이 직접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어 주도회원이 되기도 하고, 이동휘 등 개화파무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도회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당시에 새로이 성장하고 있던 신지식층이며 박은식이 지적한 바와 같이 독립협회는 '유식한 신사의 조직'이었다. (주석 2)


독립협회는 한 때 회원수가 2,000명을 돌파하였으며 여러 지역에 지회를 설치할만틈 세력이 확대되었다. 주요 활동은 ①애국계몽운동 ②국권수호운동 ③국토수호운동 ④국가이권수호운동 ⑤인권신장운동 ⑥개화내각 수립운동 ⑦국민참정권운동 ⑧정치개혁운동 등을 꼽을 수 있다. 독립협회는 개화시기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단체로서 민주공화주의사상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독립협회가 창립되어 자주독립 정신이 강화되고 있을 때인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아관파천'을 끝내고 환궁하여 같은 해 10월 12일 내각과 백성들의 상소에 따르는 형식으로 새로 지은 환구단에 나아가 이른바 '광무개혁'을 단행하였다.

고종은 조선이 청나라의 제후국과 같은 위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독자적으로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임금의 칭호도 황제로 격상하는 건원칭제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광무개혁은 황제권과 자위군대의 강화에 역점을 두었다. 그동안『독립신문』과 독립협회에서 줄기차게 주창해온 국가개혁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 채 자신의 통치권  강화에만 비중을 둠으로써 시대정신에 따르지 못한다는 비판을 불러왔다.


주석
1> 신용하, 『독립협회연구』, 84쪽, 일조각, 1976.
2> 앞의 책, 104~105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한힌샘 #한힌샘_주시경 #한글 #광무개혁 #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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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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