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을 준비한 스페인 여행은 100만원의 위약금만 남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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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리뷰 일감도 뚝 끊겼다. 방송사에서도 정규 프로그램이 결방되거나 아예 신규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제반 업무도 없어진 탓이다. 막막한 마음에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데 김포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다른 일정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하루 자고 갈래?"
여섯 살과 두 살 남매를 키우는 친구가 오래간만에 보낸 메시지였다. 스페인 여행은 취소되었고 프리뷰 일감도 끊긴 마당에 다른 일정이 있을 리 없다. 집에만 있던 나는 마스크와 목도리, 장갑으로 무장하고 친구 집을 찾았다.
두 달 만에 본 친구 얼굴이 푸석했다. "요새 힘들지?" 말을 건넸더니 친구 얼굴에 쓴웃음이 떠오른다. 바깥 외출을 한 발자국도 하지 않고 산 지 열흘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친구는 낮잠에서 막 깨어난 두 살 아들을 품에 안고 여섯 살 딸에겐 주스를 쥐어준 뒤 능숙하게 커피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친구는 전국의 어린이집 등원일이 3월 23일로 연기되면서 근 두 달을 아이 둘과 24시간 함께 보내고 있었다. 집에 영유아가 있으니 외출도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장보기는 온라인으로 대체한 지 오래고 산책도 병원에 가는 등 피하지 못할 일정이 있을 때나 가능했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엄마는 직장인이니 어디 잠깐 아이를 부탁할 곳도 없다. 뜨거운 물로 뽀드득 소리 나게 그릇 설거지하는 걸 좋아하던 친구는 "이젠 설거지 쌓인 것만 봐도 우울함이 밀려온다"며 "산후우울증도 없이 지나갔는데 요즘이 출산 직후보다 더 힘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친구가 따라준 커피를 마시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일단 일어나 외출복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섯 살 첫째와 매트리스 위에서 몸을 써가며 한바탕 논 뒤 함께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잠깐 숨을 고른 뒤 이번에는 두 아이 모두를 데리고 플레이도우로 국수며 쿠키를 잔뜩 만들고 놀았다. 두 아이가 놀다 지쳐 도롱도롱 잠들면 오늘 밤에는 내 친구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겠지.
예상대로 그날 밤 아이들은 엄마를 오래 애먹이지 않고 쉽게 잠들었다. 나와 친구 그리고 친구의 남편은 맥주를 마시며 육아와 직장생활, 프리랜서의 밥벌이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이르는 수다를 떨며 꿀 같은 육퇴(육아 퇴근) 이후의 시간을 즐겼다.
그날 이후로 나는 주변인들의 '안녕'을 물어보는 일에 시간을 쓰고 있다. 임신 8개월차 친구 L은 임산부 요가부터 글쓰기 수업까지 모든 강좌가 취소되면서 도무지 바깥에 나갈 일이 없어 좀이 쑤신단다. 나는 또 다음주쯤 마스크로 무장한 뒤 운전을 해서 L의 집에 갈 생각이다. 함께 유튜브를 틀어놓고 임산부 요가를 하면 그도 나도 조금 기분전환이 되겠지 싶어서.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아는 동생 Y는 상황이 더 나쁘다. 아예 예약이 한 명도 없는 날들이 생기면서 당장 이달 매출이 뚝 떨어졌다. 손님이 없는 김에 아예 당분간은 경기도 본가에 올라와 있단다.